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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나이로는 제가 한 살 위지만 스님은 제게 수행자로서 학자로서 크나큰 선지식(善知識)이었습니다. 오늘 옛 목멱산자락 불교학술원장실에 앉아 옛길을 더듬어보니 60년 여행길에 스님은 늘 저의 지남(指南)이었습니다.
1953년 가을 동안거 무렵이었나요? 사미계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부산 선암사에서 부전 소임을 보고 있는데 연화사 운허스님 회상에서 공부하던 학인 한 분이 오셨습니다. 스님이었습니다. 입산한지 4~5년은 됐을 때였나요? 저는 어느 순간 ‘와!’하고 소리치고 말았습니다.
어깨너머로 보니 스님은 <화엄경>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80권 화엄경. 겨우 치문을 보기 시작한 제겐 가늠할 수 없는 먼 미래의 일 같았습니다. ‘아, 나는 언제 저런 것을 볼 수 있을까’ 그것이 스님과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그 이후로도 다섯 번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사미계를 받고 1년쯤 지났을까요. 보살계를 받으러 통도사로 가게 됐습니다. 선암사 감사(監寺, 지금의 총무) 소임을 보고 있던 석암스님이 저를 자운스님에게 보낸 겁니다. 미리 약속이니 된 듯 저는 신심을 확인받아야 했습니다. 7일 만에 3만 배(拜)를 마치고 나니 단독으로 보살계를 주시더군요.
그 뒤 해인사에서 사집을 볼 때 스님은 ‘화엄패’에 속해 있었죠. 지금의 봉선사 조실 월운스님과 일본에 있는 태연스님 그리고 정우스님의 은사 홍법스님, 세 분이 1기로서 해인강원의 문호를 열어놓으셨죠. 스님은 화엄반에 있으면서 재무를 보며 대중 살림도 빈틈없이 꾸려가셨죠. 저는 2기가 될 수 있었지만 통도사 주지로 가는 자운스님과 스님 일행을 따라 나서 통도사 강원 1기가 됐습니다.
그곳에서 강원을 원만히 마치고 만행을 떠날 때가 잊히지 않습니다. 새로운 공부처를 향한다고 했지만 스님은 알고 계셨던 것입니까? 입산한지 10년 만에 처음으로 만행을 떠나는 저를 종무소로 불러 아무 말 없이 여비를 쥐어주셨습니다.
인연이란 참으로 지중한 가 봅니다. 태풍 사라호가 휩쓸고 간 도량에서도 스님은 계셨습니다. 간월도를 다녀온 뒤 남부지방을 거쳐 발길이 닿은 표충사에서 스님은 허물어진 도량을 복구하고 있었습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마산대(구 해인대학, 지금의 경남대)를 거쳐 동국대 학인길은 제가 한 발짝 앞섰나 싶었는데 아니었습니다.
일본유학과 캐나다 토론토 대각사에서 17년간의 포교활동을 하고 있는 사이 스님은 불교대학장으로서 승려 교수의 길을 닦아 놓고 저를 불러 들였습니다. 인재양성에 꼭 함께 하고 싶다면 밤마다 국제전화를 한 게 몇 번이었습니까? 그 길로 스님과의 한도량에서 생활도 시작된 것입니다.
스님 이것은 기억나십니까? 스님이 제 앞길에 환희세계를 펼쳐주셨습니다. 스님이 경국사의 북방에 계시기에 제가 스님의 거처를 무우정사(無憂精舍)라 이름 지어 드리자 스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삼일이나 지났었나요. 헛간을 고쳐 만든 제 거처를 스님이 환희세계로 바꾸어놓았죠?
“스님은 남방에 계시니 그곳은 환희세계가 아니요” 하면서 유명 서예가의 글씨로 새긴 ‘환희당(歡喜堂)’ 현판을 내놓지 않았습니까. 그게 엊그제 같은데 스님은 뭐가 그리 급하십니까? 서로 거처이름을 지어주면서 경국사는 관음전을 중심으로 동방의 동별당, 서방 극락보전, 남방 환희당, 북방의 무우정사(일명 금강반야대)로 도량을 더 친근하고 아름답게 꾸려오지 않았습니까.
인터뷰를 마치고 저는 다시 스님이 있어 근심이 없던 북두(無憂世界)를 바라보며 삼각산 길을 오르려 합니다. 스님 발자국을 따라 오르다보면 아직은 어렵지 않겠지만 스님 없는 ‘환희세계’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해인사 연화대에 들렀다 다시 돌아오시는 날 기다리겠습니다. 그날은 북방이 아닌 서방에 있겠습니다. 오시면 그곳으로 인터폰을 해 주세요.
“차 한 잔 하자(喫茶去)”고.
임진년 양력 정월 초나흘 인환 분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