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은 사위성 기원정사에 계셨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다. 여기 어떤 어리석은 사람들이 가르침을 배운다. 그러나 가르침을 배우고 나서 지혜로 그 뜻을 새기지 않는다. 지혜로 그 뜻을 새기지 않기 때문에 가르침이 선명하지 않다.

그들은 단순히 다른 사람의 교리를 반박하기 위해 또는 다른 사람을 비판하기 위해 배우기 때문에 가르침의 배움에서 결실을 얻지 못한다. 여기 어떤 훌륭한 사람들이 가르침을 배운다. 그들은 가르침을 배우고 나서 지혜로 그 뜻을 새긴다.

지혜로 그 뜻을 새기기 때문에 가르침이 선명하다. 그들은 단순히 다른 사람의 교리를 반박하기 위해 또는 다른 사람을 비판하기 위해 가르침을 배우지 않기 때문에 가르침의 배움에서 결실을 얻는다. 바르게 배운 가르침들은 그들에게 오랜 세월 동안 행복과 이익을 준다.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가르침을 바르게 파악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대들이 나의 가르침을 이해한다면 그것을 마음속에 잘 새기고 이해하지 못한다면 나에게 질문하든지 또는 지혜로운 비구들에게 물어야 한다.” (중부경전.22 알갓두빠마)

불교의 공부는 잘 듣고(聞) 그리고 들은 내용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며(思) 실천 수행하는(修) 공부법이라 말합니다. 훌륭하게 공부하는 사람일수록 잘 듣고, 듣는 내용에 대하여 잘 궁리하는 것이 가르침에 대하여 바르게 파악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배움에 대한 결실을 얻는 것은, 선명한 이해를 통한 지혜로 모든 이의 행복과 안락의 이익을 얻는다 하였습니다. 또한 지혜로 그 뜻을 새기기 때문에 배움이 선명하다고 하였습니다.

불교의 신행단계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심 없이 믿고(信) 자신이 믿고 있는 가르침은 어떠한 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정확히 이해하고(解) 그리고 믿고 이해한 것을 일상생활 속에서 구체적 삶의 형태로 실천하며(行) 부처님께서 이미 체험하셨던 것을 증득한다(證)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수행실천을 통한 깨달음의 종교입니다. 절대적 신에 대한 믿음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확신을 갖고 실천 수행을 통한 스스로 부처라는 사실을 자각하며 모든 존재물들의 가치를 존중하는 종교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의 배움은 그 가르침을 지혜로 새기지 않고, 다른 사람의 교리를 비판하고 반박하기 위해 배우는 것이며, 훌륭한 사람들의 배움은, 지혜로 그 뜻을 새겨 오랜 세월동안 궁극적으로 자신의 행복과 안락 그리고 모든 이의 이익을 위하여 배움을 얻는다 하였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어리석은 배움과 훌륭한 배움의 차이가 될 것입니다. 송나라 설송선사는 “배우는 사람은, 도(道)와 덕(德)이 자신에게 가득하지 못함을 걱정해야지, 세력과 지위가 없음을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으며, “존귀하기로는 도(道)보다 존귀한 게 없고 아름답기로는 덕(德)보다 아름다운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도와 덕이 있는 곳에는 비록 범부라 해도 막히지 않으며(心通) 도와 덕이 없는 곳에는 천하의 왕(王)이라 할지라도 통하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가르침에 따른 배움의 결실은 도와 덕을 갖추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곧 배움은 도와 덕을 가꾸어 스스로 아름다움과 행복을 모든 이에게 회향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도는 마음이 통하는 것이며 나와 너 자연과 우리 모두가 인연생기의 연기를 깨닫는 것이며 덕이란 계정혜 삼학을 닦아 행복의 문을 여는 해탈의 참 자유세계인 것입니다. 지금은 배움과 지식정보의 홍수시대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지혜로 그 뜻을 새기기 보다는 지식의 앎을 통한 비판과 반박으로 분열과 혼란을 초래하여 배움의 결실을 얻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의 배움뿐인 것 같습니다. 진정 배움의 결실이 지위와 세력에 관계없는 자신의 행복과 모든 이의 안녕을 위한 도와 덕을 갖추어 지혜의 안목을 얻는 공부의 자세가 필요할 때입니다. 불교의 공부법이 절실히 필요할 때 입니다.

[불교신문 2746호/ 8월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