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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무서워해야 할 것은 시줏돈…’
은사 말씀 지금도 귀에 들리는 듯
‘수대에 걸친 공덕’을 이야기 하며 출가인연을 장식하는 경우도 있지만 스님은 그렇지 않았다. “얼마나 박복하면 출가했겠나. 부모복, 형제복에 먹을 복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제대로 갖춰졌으면 집을 떠났겠는가. 게다가 지금은 장가도 못가는 처지가 되지 않았는가…” 스님은 어렵게 만들어진 자리라 딱딱함을 누그러트리려는 듯 가끔 농을 하기도 했다.
있는 그대로 얘기하는 것조차 그것이 언론매체를 향해서라면 더더군다나 상(相)을 내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는 면에서 애써 홍보하는 것을 스님은 달갑지 않게 생각해왔다. 하지만 스님의 이런 뜻과는 달리 정법사는 이미 본지를 통해 그 명성이 적지 않게 알려졌다. ‘도심포교당의 효시’ ‘3대 포교당의 한 곳’ ‘도심포교 100년의 상징’ 등도 그렇지만 그런 숫자에 실려 있는 것만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16년간 신도들과 함께 땀흘려온 스님이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시작된 일도 많았다. 주지취임 직후 난립되어 있는 사찰 내 신행모임을 ‘신도회’로 통합하고 모든 살림을 공개하며 ‘사찰운영위원회’에 맡긴 것이 첫 번째다.
“살림은 사찰운영위원회에서 하고 있다. 각각의 모임들은 한 달에 한 번, 불사추진위원회는 일주일에 한 번씩 재정보고를 한다.” 스님과 신도들의 말이 일치했다. 하지만 제2창건에 버금가는 불사가 진행되고 있는 정법사에는 이상하리만치 분주한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사찰을 비워본 적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스님은 늘 있어야 할 곳에 있고 신도들의 기도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사시(巳時)에 이어 오후에도 두 차례 스님은 법당에 있다. 주지 취임 이래 천일기도가 네 번째다 보니 일상이 기도이고 기도가 일상이기 때문이다.
교계 처음으로 재정공개
살림은 운영위에 맡기고
스님은 기도.불사 전념
4번 째 천일기도 들어가
스님은 기도의 ‘힘’을 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모든 것으로 느꼈다. 처음에는 공부해서 교수가 되고 싶어서 기도를 열심히 했다. 학비를 벌어 고등학교 대학교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 대학원 석사과정까지 마치려다보니 당연한 것이었다. 행자 때부터 공양주, 부전 역할까지 안 해본 게 없을 정도이다 보니 몸과 마음으로 익힌 ‘염불’ ‘기도’는 스님에게 있어 큰 이력이나 다름없다.
그 가운데 일주일간 앉지도 않고 잠도 자지 않으면서 한 염불 기도는 평생에 큰 힘이 되고 있다. 처음에는 다리가 아프고 목이 잠기기가 수차례 반복됐지만 꿋꿋이 견뎌냈다. 그러길 또 몇 차례인가 지나고 한바탕 피를 토하고 나니 몸과 마음이 오히려 안정됐다. 매사에 자신감이 생기면서 ‘원력이 있으면 안 될 것 없다’는 신념도 생겼다. 함께 기도를 해 본 신도들은 무의식적으로 한마디씩 했다. “우리 스님 부처님 같다.”
스님은 창건 당시 사찰부지의 3분의1 밖에 안 남아 있는 상태에서 주지를 맡은데 다 이듬해엔 IMF위기가 닥쳐왔지만 지역사회 누구보다도 먼저 무료급식을 시행했다. “살림도 어려운데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웅성거림도 있었지만 스님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이미 모든 절 살림을 공개하고 스님도 ‘월급쟁이’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마다 오히려 신뢰가 깊어갔다. 십시일반. 신도조직도 이미 봉사체제로 바꾸어놓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민중과 함께 호흡하지 않으면 불교는 더 이상 발전이 없다. 물론 ‘이뭣고’도 있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종교는 죽어갈 수밖에 없다”는 확신이 있었다. 무료급식을 할 장소도 없어 담벼락을 뜯어내고 컨테이너를 놓고 시작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6년 동안 일주일에 5일, 하루 200~300명이 부담 없이 급식을 하고 있다.
“상부조직이 안되면 하부조직을 개혁하고, 그것도 안 되면 여론화시키고, 저라도 모델케이스라도 돼야 일이 성사됩니다. 내가 하고 나면 다른 사찰 다른 조직에서 아 저쪽에서는 되는데 우리 스님은 왜 안 되나? 우리 스님은 왜 그렇게 못하는가? 불자들 간에 이런 여론이 생기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스님은 재정공개 1호 사찰로 한 때 본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외전을 공부하는데 큰 도움을 주지 않은 은사 스님이 때때로 원망스럽기 했지만 오늘의 지태스님이 있기까지 은사의 일거수일투족은 그대로 삶의 지표가 됐다. 은사 스님이 동국대 이사장 재직시절 시봉을 위해 약사사에 머무를 때다.
시장을 다녀오려면 반나절을 허비해야 하는 한 여름. 가는 길에 시장에 좀 내려줬으면 해서 말을 꺼냈다가 스님은 소위 본전도 못 찾았다. “이게 공용차지, 자가용이냐? 너는 걸어가라” 은사 벽안스님은 통도사 주지시절에도 승용차가 없었다. 출장 갔다 오면 잔돈은 늘 종무소에 반납할 정도로 공사가 분명했다.
“중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 시줏돈이다. 가장 무서워해야 한다. 어떤 것도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이 없다.” 은사는 늘 그렇게 말씀했고 당시 은사 연배에 이른 상좌는 기회 있을 때마다 신도들에게도 그 말씀을 당부하고 또 당부한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스님은 <금강경>의 이 사구게를 참 좋아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헛되고 거짓되어 진실이 아니다. 만약에 모든 상들을 접하더라도 그 상들이 진실한 상이 아니라고 보면, 곧바로 여래를 본다고 했다.
“포교당은 스님들이 사는 곳이 아니라 시민을 위한 공간이 돼야 한다”는 게 스님의 생각이다. 전통적인 방식의 수행이 필요하면 산중 사찰로 스님이 들어가고 도심포교당은 시민사회단체와 불교가 소통하는 공간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가진 것이 없으니 아까울 것도 없고, 내려놓은 것도 없는 것 아닌가. 잠시 쉬고 싶어 방에 앉았다가도 스님은 모니터를 통해 들어오는 신도들의 정진모습을 보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난다. “스님들을 대신해 살림을 살아주는 신도들이 저렇게 기도하는데 어떻게 마음 편하게 앉아 쉴 수 있겠는가”하는 마음이 머리를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無上甚深微妙法(무상심심미묘법)
百千萬劫難遭遇(백천만겁난조우)
我今聞見得受持(아금문견득수지)
願解如來眞實義(원해여래진실의)
너무나도 깊고 넓고 훌륭해 접하기도 어려운 부처님 법을 사람으로 태어나 만났으니 이 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겠는가. 스님은 늘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살아간다.
■ 정법사는…
창원시 마산 합포구 부림동 83-339번지 정법사의 정확한 명칭은 ‘통도사 마산중앙포교당 정법사’이다. 1912년 마산시 추산동에 창건된 정법사는 도심포교당의 효시로 수원포교당, 강릉포교당과 함께 국내 3대 포교당의 하나로 상징성을 갖고 있다.
당시 통도사 주지 구하스님이 “일본의 식민지 에서 학대받는 우리 백성을 정법으로 구제하자”며 통도사의 논과 밭을 팔아 마산에 부지를 마련한 것이 100년 역사의 시작이다.
추산동에 야산을 매입하여 1년여 공사를 거쳐 1911년 설법전을 먼저 세우고 그 이듬해 부처님오신날 창건법회를 봉행해 올해 100주년을 맞았다. 1927년엔 지금의 대자유치원이 된 배달유치원을 열어 80년이 훨씬 넘는 긴 세월동안 8000여명이 훨씬 넘는 원생을 배출하며 지역 어린이교육의 산실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제2창건 불사가 진행되고 있는 정법사 불사현장에 나온 지태스님. 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 지태스님은…

불보종찰 통도사에서 동국대 이사장을 역임한 벽안스님을 은사로 출가, 3년여 만인 1973년과 1976년 월하스님을 계사로 사미계와 비구계를 수지했다. 법호는 호암(호庵), 지태(志泰)는 법명이다.
동국대 인도철학과와 교육대학원을 거쳐 다시 통도사 승가대학에서 수학하며 중강 소임을 맡기도 했다. 통도사 교무, 노전에 이어 1996년 현 마산포교당 정법사와 인연이 되어 신도들과 함께 제2 창건의 기틀을 다져가고 있다.
주지 취임 직후인 1997년 사찰내 신도회를 하나도 통합하면서 운영위원회를 구성, 사찰살림을 모두 맡기고 스님은 기도하며 신행과 불사지도에 전념하고 있다. 1998년부터 무료급식소 보현의집을 운영하며 주5일간 하루 200여명, 독거노인 30가구에 도시락 배달도 해오고 있다. 이에 앞서 1997년부터는 가정형편이 어려운 20가구에 매월 생활보조비와 쌀 한 말을 지원하고 있다.
2001년에는 불사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정법사 주변 주택 15동을 매입한 데 이어 2년 전에는 현재 정법사가 입주해 있는 상가건물을 인수해 지역 및 사찰 신행단체들의 공동체로 활용하고 있다. 1997년 조계종총무원의 종무지도 감사 및 중앙종회 합동감사 결과 총무원장 표창패를 수상했으며 2001년에는 신도교육 및 조직화, 지역포교 활성화에 선도적 역할을 한 공로로 교육원장으로부터 모범사찰상을, 또한 같은 해 체계적 포교와 모범적인 유치원 운영으로 총무원장 표창패를 받았다.
이같은 수상실적과 함께 그동안 지역포교 활성화의 공로가 다시 한 번 알려지면서 지난해에는 포교대상 원력상을 수상했다. 영축불교대학과 불사추진위원회를 이끌며 정법사의 제2 창건을 주도하는 가운데 통합 창원시 불교사암연합회장을 맡아 전국제일의 불도(佛都) 창원건설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불교신문 2733호/ 7월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