財色之禍 甚於毒蛇

재물과 색의 화는 독사보다 심하다.

- <계초심학인문> 중에서

행자 때 배우는 <계초심학인문>의 문구인데 재물보다 여색의 화(禍)에 집중한 설명이 붙는다. 듣는 여색 기분이 황당했다. 후에 남성 출가자 중심적 해석이라는 것을 이해했다. 초월적인 것을 목적으로 하는 수행자에게 색(色)은 이성 서로에게 독(毒)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무의식적으로 배우고 젖어 자만하여 중한 목적을 잊고, 생명의 본성인 오욕보다 차원 높은 허세에 빠진다.

이 문구가 잊히지 않는 이유는 고타마 싯다르타가 남성 출가자를 우대해서 연기법을 설한 것도 아닐 텐데, 자연스레 마치 우주에 사람종이 최고가치의 생명인양, 생명의 번식법도 가지가지인데 자웅이체 중 사람의 수컷이 암수 비교 우위인양, 진리를 말하는 가르침의 종류와 언어도 다 헤아릴 수 없는데 불교가 최고인양, 그중에도 특정종파가 정법인양 안하무인 무의식적 관행에 대한 분노 때문이다. 이 분노는 원융한 법성에 대하여 생명개체의 주관대로 지껄이는 표현과 사고의 관점너머 초월적인 그 무어된 경지를 이루고 나면 오욕락이나 독사 같은 이성은 어떻게 없어지는지, 또는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끊임없이 궁구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얼마 전 쇼킹한 영화를 봤다.

중생의 마음은 버릴 것이 없어

존엄 위해 절제하고 노력해야

21세기 후반에 해인사 스님들이 로봇을 부처로 섬기는 이야기가 나오는 ‘인류멸망보고서’라는 영화가 있다. 절 안내 정도 시키려고 구입한 로봇이 불교수행에 관한 어떤 질문에도 명쾌한 답을 하고, 사람처럼 번뇌와 욕망에 흔들리지도 않으며, 한 치의 실수도 하지 않는 것을 긴 시간동안 보아온 스님들은 그 로봇에게 법명을 지어 부르며 붓다의 경지에 이른 분으로 간주한다.

로봇회사에서는 이것을 기계의 오작동으로 보고, 인간의 존엄을 해치는 기계는 존재해서는 안 된다며 해체하려 한다. 불교수행 내용이 잘 입력된 로봇은 이에 자신을 해체하려는 사람들에게 장풍을 날려 혼란상황을 가라앉히고 가부좌하여 말한다.

인간은 원래 완성된 존재였으나 사람들은 잠시 잊었을 뿐이라고. 닦아서 이루어지고, 계단을 올라가서 이르며,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상태가 붓다의 경지라면 오차 없는 기계가 붓다일 것이라고. 그리고는 스스로 전원을 끄고 열반의 모습을 보인다. 완벽을 찾아 용쓰다보니 기계를 부처로 숭배하는 수행자들의 인식이 인류멸망 징후인 것이다.

<선가귀감>에 나온다. ‘수도증멸(修道證滅)이 시역비진야(是亦非眞也)요 심법본적(心法本寂)이 내진멸야(乃眞滅也)라. 고(故)로 왈(曰) 제법종본래(諸法從本來)로 상자적멸상(常自寂滅相)이라 하니라.’ 도를 닦아 열반을 얻는다면 이것은 또한 진리가 아니다. 심법(心法)이 본래 고요한 것임을 알아야 그것이 참 열반인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법이 본래부터 늘 그대로 열반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또한 <선가귀감>에 있다. ‘수행지요(修行之要)는 단진범정(但盡凡情)이요 별무성해(別無聖解)니라.’ 수행의 요결은 다만 범부의 생각을 떨어지게 할뿐이지 따로 성인의 알음알이가 없는 것이다. ‘부용사중생심(不用捨衆生心)이요 단막염오자성(但莫染汚自性)하라. 구정법(求正法)이 시사(是邪)니라.’ 중생의 마음을 버릴 것 없이, 다만 자성을 더럽히지 말라. 바른 법을 찾는 것이 곧 바르지 못한 사도(邪道)니라.

지금 여기에서 우주와 통한다. 이 안에 우주가 있다. 욕망과 번뇌가 없다면 보리도 없다. 배려와 존중, 모든 존재의 기쁜 존엄을 위해 절제하고 노력하는 그대로가 이미 완성이다. 파도가 일지 않는 바다는 죽은 것이다. 살아 움직이기에 생명은 존엄한 것이다. 불완전이 완전이다.

[불교신문 2837호/ 8월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