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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100일 맞은 군종교구장 자광스님...자광스님 (1기, 기대표) 0
 작성자: 석림동문회  2009-12-02 14:17
조회 : 14,020  

특별인터뷰 / “불교관으로 무장한 장병양성이 목표”



11월27일은 제41회 군승의 날이다. 1968년 11월 제1기 군종법사 5명을 파견한 날을 축하하는 기념일이다. 이날 군종교구는 한 해동안 열심히 일 한 군승을 선발해 포상하고 군포교를 지원한 민간인과 현역불자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마침 올해 군승의 날은 제2기 군종교구장 자광스님이 취임한지 100일 즈음되는 날이다. 지난 10일 자광스님을 만나 수행이력과 앞으로 군종교구 운영 방안 등을 들었다.

군승파견 최초의 대령출신 ‘비구’

전역 10년 넘어 군종교구장 취임

자광스님의 수행 이력은 곧 군포교 역사다. 정화 후 종단은 승려 교육에 매진했다. 강원을 활성화하고 현대식 교육을 위해 동국대에 우수한 인재들을 입학시켰다. 종단에서 돈을 대 공부를 시키는 종비생 제도를 마련했다.

자광스님은 전통과 현대 교육을 모두 이수했다. 스님은 해인강원에 입방했다. 강원에서 경학을 연찬하면서도 은사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제방선원을 다니며 화두를 참구했다.

당시 해인강원은 승려교육의 요람이었다. 당대 최고 강백들이 모두 포진하고 젊은 인재들이 모여들던 곳이었다. 운허스님이 강사로, 젊고 총명했던 지관스님이 해인강원을 1기로 마치고 중강으로 후배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조계사에서 큰 스님들을 시봉하던 자광스님도 해인강원에 입방했다. 해인강원을 다니던 중 1964년 종비생 제도가 생겼다. 변화하는 현대 사회에 대응하고 포교를 위해서는 대학을 다녀야한다는 어른 스님들의 권유에 따라 다시 종비생에 응시했다. 1기생이었다.

백상원 기숙사에 머물고 공부하면서 종단의 중책을 맡고 있던 은사 경산스님을 시봉했다. 졸업 후 2년간 명성여고 교법사로 청소년을 지도했다. 출가한지 벌써 10년이 넘고 세납도 30줄에 이른 당시로는 중진 반열에 들어섰다.

<사진> 군종교구장 자광스님은 군종장교 최고위계급인 대령으로 전역하고 비구승으로 다시 산문에 돌아온 최초의 예비역 군승이다. 전역한지 10년이 넘은 스님은 다시 군포교 일선에 섰다.

정화의 주역이었던 청담스님, 경산스님 등의 노력에 힘입어 군법사 제도가 생겼는데 대학을 졸업한 비구승이 태부족이었다. 대졸 이상의 대덕 법계 품계라는 자격요건을 갖춘 스님을 찾지 못해 기혼자도 수계를 해 파견시켰다. 자격도 자격이지만 월남에 가야하는, 생명을 담보하지 못하는 위험하고 어려운 일을 하려들지 않았다.

“총무원장 스님 상좌로 자격까지 갖추고 있었는데 외면할 수 없었다”는 스님은 32살에 임관했다. 육사에서 4년을 근무하며 화주를 해 생도를 키웠다. 이들이 장성이 돼 군내 불교를 든든히 받치고 있다. “많은 보람이 있었지만 1995년 국방부 군종실장을 하면서 기독교에 비해 월등히 적은 군종장교 수를 획기적으로 높인 것이 가장 보람 있다. 당시 기독교신문 보도를 보면 나를 기독교 군내 선교를 막은 주범으로 꼽고 있다. 우리 불교 입장에서 보면 정 반대이지만….”

25년의 군 생활을 마감하고 전역했다. 당시까지 군종 장교가 갈 수 있는 최고위 계급인 대령까지 진급하고 다시 비구승으로 산문에 돌아온 군승은 아무도 없었다. 결혼을 하지 않고 비구를 유지하던 군승들은 대개 일찍 산으로 돌아갔다. 독신을 유지하면서 군생활을 한다는 것은 보통 각오로 되지 않는다. 유혹도 많다. 무엇보다 결혼이 종단법으로 인정되는데다 장기복무를 하면 당연히 결혼하는 문화가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스님은 끝내 독신을 유지했다. “우리 은사스님이 청정 승가 가풍을 세우는 정화에 앞장선 분이다. 나는 그분의 맏상좌이고. 은사스님은 비구승의 상징과 같은 분이었다. 큰 스님 평소 지론이 수행자는 맑아야 중생제도를 할 힘이 생긴다고 강조하셨다. 늘 깨끗하고 수행자다운 삶을 사시다 가셨다. 상좌인 내가 그대로 따르지는 못한다 해도 따라야할 가르침이었다.”

스님은 군승 파견 후 최초의 대령출신 비구승이 되었다. 스님은 당시 총무원장 월주스님께 편지를 썼다. 편지 핵심은 이런 것이었다. “이제 종단이 부여한 임무를 마치고 종단으로 다시 복귀하고자 합니다. 종단으로 복귀하는 의식을 갖기를 원합니다. 제 행적을 조사해서 비구승으로 하자가 있으면 취소하겠습니다. 만약 하자가 없다면 원장스님께서 다시 삭발을 해주셔서 종단 복귀 의식을 치러주시기 바랍니다” 종단은 호법부로 하여금 한 달 간 조사토록 했다. 아무런 하자가 없었다. 스님은 “월주스님께서 새벽에 영화사로 불러 직접 머리를 깎아 주셨다. 그리고 삭발염의한 모습으로 원광사 법당에서 전역법회를 열었다”고 말했다.

종단의 부름을 받고 떠났던 군포교 현장을 마감하고 다시 돌아온 산문은 그러나 예전같지 않았다. 당신이 머물 사찰 한 곳 없었다. 17살 산에 들어와 본적까지 조계사로 이전해 놓았지만 조계사에는 스님이 발조차 디딜 수 없었다. “연금을 받고 있으니 다른 돈은 필요없고 남의 절에서 마당이나 쓸며 조용히 수행하고 싶었던 작은 소망이 실현하기 어려운 꿈이 된 현실을 목도하고 작은 토굴을 마련해 낙향했다”

하지만 포교는 내려놓을 수 없었다. 포교는 스님이 수행자로 존재하는 이유였다. 불교텔레비전에 출연해 법문하고 교도소.시청.경찰청 등을 찾아 법문했다. 돈 안나오고 남들이 찾지않는 곳만 다녔다. 그러자 스님을 존경하던 어느 신도가 용인에 작은 포교당을 마련했다. 용인의 반야선원이다. 그리고 전역한지 10년이 넘은 올해 이번에는 제2대 군종교구장으로 다시 군 포교 최일선에 섰다. 스님은 왜 평생을 포교일선을 떠나지 않는가.

“익혀온 습이 포교이기 때문이 아니다. 포교 현장처럼 공부가 잘되는 곳이 없다. 이 현장에 있으면 계행도 저절로 지켜진다. 포교사는 고도의 도덕성을 요구한다. 아주 청정한 승가상을 갖추어야 자기가 말한 만큼 책임질 수 있다. 포교는 수행의 기본이다. 중생을 외면하고 힘들고 고달프게 사는 중생들의 삶을 살피지 않고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포교현장은 아주 거칠다. 마치 척박한 자갈밭을 일구어 농사를 짓는 것과 같다. 나는 보살을 중생과 희노애락을 같이 하는 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어디서 포교해야 할 것인가. 불교관으로 무장한 장병양성이 내 목표다.”

박부영 기자 chisan@ibulgyo.com

사진 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자광스님은…

1942년생인 자광스님은 1957년 화엄사로 입산해 1959년 총무원장을 역임한 경산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수지했다. 화엄사 해인사 건봉사 상원사 등에서 참선 수행했으며, 1963년 해인사 강원 사집과를 수료하고 자운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1968년 동국대 불교대 인도철학과를 종비생 1기로 졸업하고 청소년 포교활동을 하다가 군포교 원력을 세우고 1970년 군승으로 임관했다. 1980년 군승단장에 취임한 이후 해 기독교 위주의 예산 배정의 부당함을 시정했다.

1990년 보국훈장 ‘삼일장’, 1992년 포교대상을 수상했다. 1993년 국방부 군종실장에 취임해 군종장교 정원을 조정, 군승법사 정원을 100여 명으로 증원하는 등 군불교 활성화에 기여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1995년 대령으로 예편했다.

 

[불교신문 2577호/ 11월25일자]

2009-11-21 오전 10:13:26 /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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