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이 차를 운전하는 모습을 보면 왠지 어색해 보인다고들 말한다. 목사나 신부님이 운전하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지만 유독 스님의 운전은 그렇다는 것이다. 이는 불교에 대해 대중들이 더 높은 도덕적 기대를 걸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거니와 이미 천년 전에도 이와 비슷한 말이 있어 흥미롭다.
삼국유사의 '경흥우성(憬興遇聖)'에서는 경흥국사가 화려하게 치장한 말을 타고 입궐하려고 하자 문수보살이 나타나 이를 경계했다고 전한다. 또한 미륵보살도 "나는 말세에 염부제(인도)에 태어나 먼저 석가의 말법제자들을 제도할것이다. 다만 말을 탄 비구만은 제외해 그들이 아예 부처를 보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세상이 온통 하루가 다르게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말은 경마장으로 밀려난 대신 자가용 승용차가 등장했다. 컴퓨터와 각종 통신수단이 발달해 이제 어지간한 일은 제자리에 앉아 처리할 수도 있게 되었다. 하지만 세상이 더욱 번잡해지면서 삶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문명이 제공하는 편리함과 서비스 기능을 총동원해도 폭주하는 신변잡사와 업무량을 이겨내지 못한다.
그러나 그토록 복잡다단한 일들이란 대체로 하지 않아도 무방한 일이거나, 하지 않으면 오히려 좋은 일도 많아 보인다. 사람들은 어딘가 들떠 있고, 흥분돼있고, 분주하고, 분주함을 즐기고, 욕망의 빛깔로 번쩍이는 눈빛을 날카롭게발산하면서 동분서주하고 있다.
물론 미륵보살이 말 탄 비구에 대해 비판한 것을 승용차를 이용하는 현대의 승려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미륵보살의 경계는 말이 사치품이던 시대에 나온 것이며, 현대의 승용차란 사치품이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승용차를 비롯한 문명적 도구의 사용을 부당하다고 볼 수 없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현대불교가 산중에만 머물 수는 없다면, 오히려 스님들의 승용차 사용을 권장할 필요조차도 있다.
그렇지만 미륵보살이 말 탄 비구에 대해 가한 비판의 근본적 정신만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유효한 충고로 기억될 가치가 있을 것이다. 한 번쯤 되돌아 보자.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하여 이토록 바삐 살아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