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화선은 무신 정권에 노예다 간화선을 주장하고 있는 승려들은 이점에 대하여 분명한 해답을 해야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간화선이 불교라고 말하고 있는 자들이 있다면 무신 정권에 의탁해서 민중을 수탈하는 수탈자나 다름이 없다 고려의 성립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의 불교가 소멸되고 후백제 5년 간의 불교가 왕건의 추종 세력에 동조한 지방의 토호 족에 기생했던 승려들이 왕권에 결탁한 간화선을 행한 위장 승려들에게 의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소멸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되었다
고려 왕건은 후백제를 무력으로 멸망하게 하고 그 동안에 불교의 흐름에 대한 종파 불교를 만들었다 이것은 바로 통치의 수단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신라에서 전해오던 화엄종 계통의 불교는 의상을 중심으로 고려에서는 균혀를 들 수 있다 균혀는 의상의 추종 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오늘날에 전해 오는 균혀의 작 항가11 수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같은 역사적인 사실을 깡그리 짓이겨 버리는 고려 불교의 간화선 자들 그들의 토호 족에 결탁하여 만들어진 것이 바로 간화선 파들이다
그 동안 불교의 모습을 저 버리고 민중의 수탈자들이 왕건에게 아첨하여 만들어낸 간화선 파들 그들에 의하여 민중들이 죽음으로 갔고 부처님의 가르침이 상실하는 살인적인 행위를 가한 고려 불교다 고려 불교를 찬양하고 있는 수행자가 있다면 그는 민중을 수탈하고 민중의 존재를 부정한 자들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민중을 위하지 않는 불교는 불교가 아니다 민중을 위하는 불교야 말로 진정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 할 수가 있다 간화선을 주장하고 있는 자들은 민중의 수탈자나 다름이 없다
고려사에서 보면 불교의 발전에 공헌한 승려들이 존재하지만 그 모두가 왕권에 협력한 자들이 아니고서는 승려가 될 수도 없었고 사찰에 주지도 임 할 수도 없는 시대에 토호족의 비호를 받은 승려들 그들은 중국의 불교를 의지 했을 뿐이다 중국의 불교를 의지하지 않고서는 승려로써의 기능을 상실한 시대다 그리하여 중국에서 권력에 결탁한 승려들이 고려시대에도 권력과 결탁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것은 바로 간화선이라고 말하는 승려들에게 주어진 하나의 민중 수탈이다
간화선에 대하여 이론을 전개한 책을 보면 전혀 역사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언어 자체에 문제가 있거나 역사적인 근거에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간화선의 전개 과정에서 전혀 이론이 바르지 못한 이론이다 간화선자는 말할 것이지만 간화선에 무슨 이론의 전개가 필요하지 않다고 말 할지도 모르지만 고려 시대에 불교는 적어도 역사적으로 성찰하고 있어야 한다
혜능에 대하여 말하자만 수계를 받지 않았기에 행자라고 말한 부분에 대하여 어떠한 이론을 제시한다고 해도 부처님의 계를 통하지 않고서는 출가 수행자라고 말 할 수 없다 그 당시에 중국 남부 지역에 역사적인 모습을 보면 폭력 도 들과 결탁한 승려 집단을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오늘날에 말하는 소림사 파들의 폭력성, 그들의 결탁에 의하여 혜능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인정하는 아니 묵인하는 결과를 초래한 점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간화선에 대한 말하고 있는 이들은 보조스님을 간화선에 주자로 말하고 있다
중국에 당나라도 망하고 송나라가 등장하고 있는데 송나라에 유학을 간 승려들에게 주어진 것은 무엇인가 당나라가 아니고 송나라의 모습에 고려 불교, 고려 사회는 변화를 시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송나라에는 주자학이 등장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승려들 그들은 민중의 수탈에 탐닉하여 시대의 변화를 알지 못했다 그러한 결과로 보조는 정혜 결사문을 지어 불교를 바르게 이끌려했던 것인데 간화선자들은 보조에 대한 잘못을 말하려는 자들이나 다름이 없다 보조는 고려 불교를 새롭게 하려는 결사 운동가다 간화선자가 아니다
( 송대는 북송시대(960∼1126)와 남송 시대(1127∼1279)로 나뉘어진다. 북송시대는 오대(五代)의 문화를 이어받아 요(遼)와 대립하고, 남송 시대는 양자강 이남의 문화를 주체로 하여 금(金)과 병립하였다. 원래 중국의 회화는 도교적이거나 불교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었으나 송대에는 이러한 불교 도덕에서 해방되어 자연으로 돌아가 순수한 회화로 독립하게 된 시기이다.
송나라의 문화는 흔히 서양의 르네상스 문화와 비교되기도 하는데, 복고적(復古的)인 성격이 송대문화의 한 특징을 이루는 까닭이다. 예를 들어 문학, 특히 산문(散文)에 있어서 송나라는 하나의 뚜렷한 시대적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당나라 말기부터 한나라의 고문(古文)으로 돌아가자는 이른바 고문부흥운동이 고개를 들었으나 그 세력은 아직 미미하였다. 그러나 북송 중기부터 구양 수(歐陽修) 등이 고문부흥운동을 다시 제창하면서 이 운동은 사대부들의 동조를 얻게 되고 마침내 문단의 큰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또한 송나라의 유학(儒學)은 주자학(朱子學)으로 대표되는데, 이것 역시 하나의 사상부흥운동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때까지의 유학은 훈고학(訓學)이 주류를 이루어 경전(經典)의 자구(字句) 해석에만 천착하는 학문이었다. 그로 말미암아 유교는 정작 민중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오히려 불교보다 열세에 놓인 느낌마저 있었다.
그와 같이 민중과 유리되었던 유교가 송대에 이르러서는 불교의 자극을 받고 고대의 원시유교(原始儒敎)로 되돌아가 성현(聖賢)의 정신을 올바로 파악하려는 새로운 기운이 싹텄다. 그리고 이것이 곧, 주자학으로 열매를 맺게 되었다. 복고풍조는 각 분야에서 다양하게 개화되었으며 취미분야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가령, 당나라 이전의 중세기에는 정원을 꾸밀 때에도 정원석(庭園石)에 채색을 하는 등 인공미(人工美)를 극도로 살린 화려한 조경(造景)이 환영을 받았으나, 송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원시적인 자연경관을 살린 정원을 매력있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와 같은 풍조와 아울러 사대부의 생활 주변에도 고품(古品)을 아끼고 사랑하는 복고취미가 크게 유행하였다. 고동기(古銅器) 같은 것이 발굴되면 사대부들은 그것을 서재에 장식하고 감상하는 것을 하나의 취미로 삼았다. 송나라 때 편찬된 《고고도(考古圖)》 《박고도(博古圖)》 등은 모두 고동기 발굴품을 수록한 책들로서, 학문적으로 귀중한 자료가 되는 것은 물론이지만, 당초의 편찬 동기는 취미생활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취미생활뿐만 아니라 의학분야에도 복고 또는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풍조가 파급되고 있었다.
당나라 때까지의 양생법(養生法)은 신체에 이상이 생기면 밖으로부터 약을 투입하여 치료하는 대증요법(對症療法)이 채택되고 있었다. 그러나 송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이른바 온보(溫補)의 방법이 등장하여 일정한 기간 동안 환자의 체내에 질병에 대한 저항력을 길러줌으로써 질병을 자연 치유케 하는 방법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옛날로 돌아간다는 것은 말하자면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이며, 꾸밈이 없는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얘기이다. 송나라 이전의 문화를 그 원인이야 어디 있건 인간 본래의 개성이 몰각(沒却)됨으로써 어떤 한계점에 부닥친 문화라 특징짓는다면, 송나라 문화는 인간의 자각과 더불어 그 개성이 발굴되고 존중되는 풍토 위에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송나라 문화의 또 하나의 특색은 서민문화의 발달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문화가 모든 백성에게 골고루 향유될 수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한정된 계층, 곧 큰 도시에 사는 서민들의 생활 향상에 따라 발생한 현상이었다. 송대에는 산업이 발달하고 생산력이 증대되면서 상거래가 활발해지자 상인들의 세력이 커지고 도시도 발달하였다. 도읍지인 카이펑[開封]은 인구가 100만 명에 달하였다고 하며 당시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이와 같은 대도시를 배경으로 하여 사대부들의 귀족문화가 발달하였다. 그리고 이 문화는 서민들의 생활이 향상되면서 자연히 서민층에도 확산되었다.
예컨대, 북송의 철종(哲宗) 연간에는 오늘날의 난징[南京]에 전당포·주점·잡화상 등으로 구성된 시사(詩社)가 있었다. 그들의 시(詩)가 사대부의 시와 견줄 만한 수준에 미치지 못한 것은 물론이지만, 송대의 문화가 서민계층에까지 파급되고 시작(詩作)의 저변이 확대되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며, 당나라 때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현상이다. 송대에는 귀족문화의 서민층에 대한 침투와 아울러, 서민문화가 귀족층에 끼친 영향도 찾아볼 수 있다. 도읍에는 구란(勾欄)·와자(瓦子)라는 오락시설이 있어서 잡극(雜劇)· 재담(才談)·요술 따위 연희(演戱)가 서민들을 관객으로 하여 번창하였다. 잡극은 뒤에 더욱 발전하여 원곡(元曲)이 되고 사대부들도 그것을 창작하게 된다. 또한 속어(俗語)가 시문(詩文)에 사용되는 경향이 뚜렷해지는데, 이것 역시 서민문화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처럼 귀족층이나 서민층의 문화가 발전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송대에 이르러 서적 인쇄술이 비약적으로 발달함에 따라 누구나 책을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는 점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 자료 참조
고려 불교를 바르게 알기 위하여서는 주자학의 변화에 대응하는 불교를 창안할 수 밖에 없다 고려 불교의 무신 정권에 의하여 자행되어온 간화선자들에게 민중의 이름으로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민중에게 아무런 힘이 주어지지 않는 불교 간화선을 주장한 자들이 고려 무신 정권과 결탁하여 민중들에게 고통을 주고 민중들에게 죽임을 가한 간화선으로 인하여 피해를 당한 민중들에게 이번기회에 참회하지 않을 수 없다 고려 무신 정권에 의하여 죽음으로 간 교종 승려들과 이를 막기 위하여 나선 민중들에게 진실로 참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