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암잡록
서(2)
온 서중(無恕中)스님은 호구(虎丘)스님의 8대손으로서 큰 도량에 앉아 법을 설하고 중생을 제도하여, 승속 모두에게 귀의할 바를 제시해 주었다. 그의 "이회어(二會語)"는 무상거사 송렴(無相居君 宋濂:明代 學者)이 서문을 쓴 바 있지만 "산암잡록(山艤雜錄)"에 대해서는 서문이 없었는데 스님의 큰제자 쌍림사(雙林寺) 주지 현극 정(玄極頂)선사와 전 남명사 주지 운중 선(萊中垣)스님이 함께 나를 찾아와 서문을 청하였다. 나는 한두 차례 훑어본 후 현극스님과 운중스님에게 말하였다.
"지난 날 "이회어(二會語)"를 읽어보고 감탄해 마지 않았다. 어쩌면 그렇게 천갈래 강물이 한 근원에서 흐르듯 세찬 문장력을 구사했는지, 어쩌면 그렇게 천지를 뒤흔드는 천둥번개처럼 번뜩이는 필치를 휘둘렀는지, 어쩌면 그렇게도 다듬은 흔적을 찾을 수 없이 막힘없고 원만하게 써내려갔는지, 어쩌면 그렇게도 가지와 덩쿨을 잘라버려 쓸모없는 말이 없으면서도 구별[町 :밭두덕〕 을 초월하여 정식(情識)의 경계에 떨어지지 않았는지! 그것은 아마도 참다운 불법에서 흘러나온 문장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쪽 저쪽에서 주워 모아 문장을 구사하는 자들과 비교해 보면 어찌 구만리 차이 뿐이겠는가. 그의 말을 통해 그의 깊이를 살펴보면 그는 부처와 보살의 경지에 이른 분이시다. 그러나 후인을 격려하고자 간간이 제창하신 법문은 불법의 요체를 밝히고 자신의 큰일을 끝마치는 것으로 목적을 삼으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널리 미쳐줄 수 있는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이 책을 살펴보니, 위로는 조정에서부터 마을과 시장거리 및 아래로는 산림속에 이르기까지 인물, 행적, 사실, 문장 등을 선하다고 써야 할 곳과 그렇지 못한 곳, 옳다고 써야 할 곳과 그렇지 못한 곳, 마땅히 이래야 할 곳과 그래서는 안될 곳, 우수하다고 써야 할 곳과 그렇지 못한 곳을 빠짐없이 써놓고 있다. 이로써 선을 권장하기도 하고 악을 징계하기도 하니, 유학자·불교도·도교인·관리·은거한 선비·늙은이·어린이·부귀한 자·비천한 자·상인·예술가·백정·농사꾼,
그리고 나아가서는 부녀자와 가마꾼 노비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유익한 책이 되었다.
자비의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면 한 치의 땅도 덮어주지 않는 곳이 없고, 불법의 비가 줄기차게 내리면 한 포기 풀잎까지도 적셔주지 않는곳이 없고 해와 달이 동쪽에서 솟아 서쪽으로 기울 때 어두운 거리를 비춰주지 않는 곳이 없으며, 위로는 하늘이 덮어주고 아래로는 땅이 실어주어 모든 생명을 붙잡아 주지 않는 게 없다. 이 책을 지으신 마음도 이와 같아서 대자대비로 일체중생을 가엾게 여기사 많은 방편으로 교묘히 인도하여 삿됨과 망녕됨을 버리고 참다운 지혜에 어둡지 않도록 하니, 차이가 없는 평등이란 이런 것이다. 부처님 같은 스님의 자비가 여기에 있기에 참으로 부처와 보살의 지위에 이른 분이라 한 것이다.
이 책을 한 번 보고서 훌쩍 돈오(頓悟)한다면, 선을 권하고 악을 징계하지 않는 데에서 비롯하여 무엇이든 권하고 징계하는 데에 이르게 되고, 권하고 징계하지 않는 것이 없는 데에서 다시 권하니 징계하니할 것도 없어진다. 그리하여 바른 길로 말미암아 깨달음의 경지로 들어감으로써 굳어진 습기(習氣)에 부림을 당하지 않고 업식(業識)에 매이지 않게 된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스님께서 이 책을 편찬하신 깊은 마음을 체득하는 것이며, 현극스님과 운중스님이 이를 서둘러 간행하고 이를 유포하는 그 마음도 스님의 같은 마음이다.
아! 그저 보통 붓 나가는대로 기록하여 부질없이 견문만을 넓히고 쓸데없는 이야기를 지껄여대는 따위의 책들과 이를 견주어 볼 수 있겠는가?"
나는 이 말로서 서문을 가름하는 바이다.
홍무(洪武) 25년(1392) 겨울 10월 24일 무문거사 미산(無聞居君 眉山)소백형(蘇伯衡)서
서(3)
도는 말을 통해 밝혀지고 말은 덕에 의해 전해진다. 그러므로 덕 있는 자의 말은 한 시대 사람에게만 믿음을 줄 뿐 아니라, 후세까지도 의심없이 전해진다.
서중(無 恕中:1309∼1386)스님은 서암사(瑞岩寺)의 일을 그만두고 태백산 암자에 한가히 머물면서 스스로 도를 즐겼다. 쓸쓸한 방에는 물건들이 넉넉하지 못했는데도 도를 배우려는 사람들의 신발이 매일 문 밖을 메웠다. 그들은 밀어내도 가지 않고, 어쩌다가 한 말씀 얻어 들으면 천금처럼 귀중히 여기는 정도가 아니라 마치 감로수(甘露水)나 제호(醍 )를 마신 듯 마음과 눈이 한층 빛났다. 이는 스님께서 평소 여러 큰스님의 문하를 참방하여 보고 들었던 아름다운 말과 선한 행실들을 마음 속 깊이 원만히 체득해서 말로 표현하였기에, 아름답게 꾸미지 않아도 자연히 훌륭한 격식을 이룬 것이리라. 총림의 큰스님과 유학의 선각자, 그리고 아래로는 마을의 어린아이들까지 그들을 격려시킬 수 있는 선한 이야기와 그들을 경계시킬 수 있는 악한 이야기가 있으면 사람들에게 들려주어 그들의 마음을 열어주고 이를 기록하여 "산암잡록(山艤雜錄)"이라는 책으로 만들어냈다.
취암사 주지로 있는 그의 제자 현극 정공(玄極頂公)이 이를 간행하면서 멀리 서울까지 찾아와 특별히 나에게 보여주었는데, 나는 읽으면서 차마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이를 계기로 나는 "태평성대의 말이란 모두 바른 법을 따르므로 거친 말과 부드러운 말이 모두 진리다"한 말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비유하자면 훌륭한 의원이 다루면 모든 초목이 약이 되지만 모르는 자는 손에 약을 쥐고서도 병을 만드는 것과 같은 일이라고 하겠다. 세간과 출세간의 모든 법이 불법 아닌 것이 없으므로 이치에 밝은 자가 이를 얻으면 모두가 세상에 전해지는 가르침이 된다. 덕이 있으면 말을 남기게 된다함은 스님을 두고 이르는 말로서 스님은 약과 병을 잘 아는 자이며, 불법을 잘 말하는 자이다.
나와 스님과는 한 문중이라는 우의가 있으므로 비록 한 차례도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었지만 그의 명성과 행적은 몇년 전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으며 그가 대중을 감복시킬 만한 덕을 지녔고 세인을 가르칠 만한 말씀을 남겼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 터이다. 그러므로 말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믿어 의심치 않을텐데 더구나 이 책의 내용은 모두가 있었던 사실이다. 사실을 통해 이치를 밝히고 가까운 일을 들어 먼 것을 가리키는 법이니, 이 책으로 당세를 유익하게 하고 끝없이 전해주어야 한다.
홍무(洪武) 기사년(1389) 여름 6월 승록사 좌선세(僧錄司左善世) 홍도(弘道)서
서(4)
나는 평소 병 많은 몸으로 노년에 일본의 주청(奏請)에 관한 일로 조정의 부름을 받아 서울에 올라가게 되었다. 이에 혼자 생각해 보니 설령 일본을 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떻게 살아 돌아올 수 있겠나 싶었다. 평소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했는데 다행히도 성상폐하께서 나를 가엾게 여겨 특별히 일본의 주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궁궐에 머물게 하셨다. 그리고 나서도 온갖 병들이 끊임없이 나의 몸을 침범하여 세번이나 죽을 뻔 했지만 또한 천행으로 폐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천동사(天童寺) 옛절로 돌아가도록 명하시니, 친구들은 내가 마치 다시 세상에 태어나기라도 한 듯이 반겼다.
내 나이 칠십에 가까운데 만번 죽을 고비를 겪고 다시 한번 삶을 얻게 되었기에, 이제 문을 닫고 모든 인연을 끊은 채 여생을 마칠까 하였는데 법질(法姪) 장경중(莊敬中)이 자주 나의 암자에 찾아와 이렇게 청하였다.
"당·송 시대 큰스님들의 말씀과 저서는 끊이지 않고 간간이 세상에 나왔었는데 원나라부터는 이러한 일이 드물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근래 큰스님들의 법문과, 총림의 귀감이 될 만한 아름다운 말씀이나 행실들이 대부분 없어져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노스님께서는 총림의 전성시대를 맞이하여 많은 큰스님을 두루 참방하여 넓은 견문을 지니셨습니다. 제가 항상 노스님을 모시면서 들은 한두 가지 일만 해도 모두 이제껏 듣지 못했던 이야기로서 저를 더욱 깊이 일깨워주었습니다. 바라옵건대 노스님께서는 그저 유희 삼아[遊戱三昧] 한 권의 책을 만들어 위로는 옛 스님의 숨겨진 빛을 나타내시고 아래로는 후학들의 고질병을 벗겨 주신다면 불법문중의 경사가 되리라 믿기에 감히 간청을 드리는 바입니다."
내가 말했다.
"그대의 마음이야 참으로 아름답다. 그러나 내 말은 문장이 될 수 없으니 말을 하되 문장으로 잘 표현되지 못한다면 어떻게 먼 훗날까지 전해질 수 있겠는가? 이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경중은 또다시 말하였다.
"이제 불법은 쇠하고 선배스님들도 거의 사라지셨습니다. 이런 때 노스님께서 먼곳에서 돌아오실 줄은 실로 예기치 못했던 일이었는데, 노스님께서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고 거절하신다면 장차 누가 이 일을 맡겠습니까? 문장이 잘되고 못되고를 어찌 따지겠습니까? 사실대로 기록하여 그 일을 밝힐 수만 있다면 충분합니다. 바라옵건대 굳이 사양하지 마십시오."
그리하여 나는 평소 스승과 도반이 강론했던 법어들과 강호에서 보고 들은 일 가운데 기연(機緣)의 문답과 선악의 인과응보, 그리고 말 한마디, 행동 하나, 낱낱의 처신 등을, 시대의 선후와 인물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후배들을 일깨울 수 있는 일이라면 생각나는대로 붓 가는대로 사실에 근거하여 기록하고 이를 "산암잡록(山艤雜錄)"이라 이름하였다.
지난 송대(宋代)에 큰스님이 편수한, 이른바 "나호야록(羅湖野錄)" "운와기담(雲臥紀談)" 등에 기재된 바는 불법의 제일의제(第一義諦)를 고무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내 젊은 시절 이러한 류에 대한 기억이 있었으나 이제는 십중팔구는 잊어버렸고, 노년에 바다 한쪽 끝에 살다보니 사람들에게 물어 많은 자료를 채집할 수도 없었다. 이에 따라 빠진 것이 많음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바이다.
말을 하되 도로써 하는 것은 지극한 말로써 일찍이 말한 것이라 할 수 없다. 이밖의 것은 나의 분수에 벗어난 일이다. 그러나 우리 총림에 사마천(司馬遷)과 반고(班固)의 붓을 잡는 자가 있다면 어쩜 이를 채택해 주지 않을까 한다.
홍무(洪武) 8년(1357) 12월 15일 천태산인(天台山人) 석 무온(繹無)서
1. 말후구(末後句)/ 보엽 묘원(寶葉妙源)스님
정수사(定水寺) 보엽(寶葉妙源)스님은 사명(四明) 사람이다. 경산사(徑山寺) 허당(虛堂智愚:1185∼1269)스님에게 공부하였는데, 선문 화두에 깨치지 못한 바 있으면 반드시 공부 많이 한 이에게 묻고, 깨닫기 전에 그만두는 일이 없었다.
어느날 허당스님을 찾아가 물었다.
"덕산(德山)스님의 말후구(末後句)를 만일 있다고 한다면 어찌하여 덕산스님께서 알지 못하였으며, 만일 없다고 한다면 암두(岩頭)스님은 어찌하여 "덕산스님은 알지 못했다고 말하였습니까?* 스님께서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가르쳐 주십시오."
"나는 모르니 그대는 운(雲)수좌를 찾아가 물어보도록 하라."
이에 스님은 운수좌에게 물어보러 갔는데, 마침 운수좌는 산에서 돌아와 발을 씻으려고 물을 찾던 중이었다. 스님은 재빨리 물을 가져다 드리고는 몸을 굽히고 손을 내밀어 운수좌의 발을 씻겨주면서 고개를 들어 물었다.
"덕산스님의 말후구에 대하여 저는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수좌께서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운수좌는 느닷없이 발 씻으려던 물을 양손으로 그에게 끼얹으며 말하였다.
"무슨 말후구가 있단 말이냐?"
스님이 그의 뜻을 알지 못하고 이튿날 허당스님을 찾아보니 허당스님이 물었다.
"내 그대에게 운수좌를 찾아가 말후구를 물어보라 하였는데 그가 무어라 말하던가?"
"화상의 말씀대로 물어 보았더니 그가 발 씻은 물을 나에게 끼얹었습니다."
"다른 말은 하지 않던가?"
"무슨 말후구가 있느냐고 했을 뿐입니다."
"그렇지! 내 너에게 말하여 주리라. 그는 깨달은 자라고."
스님은 이 말에 의심이 풀리게 되었다. 운수좌는 바로 한극(閑極)화상으로 허당스님의 수제자이며 높은 수행을 닦아 호구사의 주지를 지내다가 돌아가셨다.
2. 죽을 날을 받아놓고/ 인 대방(因大方)스님
평강(平江) 정혜사(定慧寺)의 주지 인 대방(因大方)스님은 천태(天台) 사람으로 고림(古林淸茂)스님의 법제자이다. 자질구레한 일에 얽매이지 않고 활달자재하였으며 군수 주의경(周義卿)과 친분이 있었다. 대방스님이 절 일을 그만두고 영암사(靈岩寺) 화(華)노스님 방에 머물던 지정(至正) 무술년(1358) 9월 8일, 주의경이 공무가 있어 사찰을 찾아가 스님을 방문하자 대방스님이 그에게 말하였다.
"나는 이 달 14일에 이 산에서 죽을 것이니 그대는 나를 위하여 이 사실을 증명해 주오."
주 군수는 장난이겠거니 생각하고 그러하겠노라고 답한 후 떠나갔는데 13일이 되자 게송을 주군수에게 지어 보냈다.
어제는 바위 앞에 땔감 주워 모아놓고
오늘 아침 이 허깨비 몸 한 줌 티끌 되리라
어진 그대에게 정성껏 말하노니
하늘에 구름 걷히면 한조각 달만 남겠지.
昨日巖前拾得薪 今朝幻質化爲塵
殷勤寄語賢候道 碧落雲收月一痕
주의경은 이 게송을 받고서도 믿기지 않았다. 이날 밤 화(華)스님에게, "마른나무를 쌓아놓고 하나의 앉을자리 하나를 달라'고 청하자, 화스님은 "마른나무야 말씀대로 드리겠지만 좌대는 없다'고 하였다.
대방스님이 화스님이 앉아 있는 나무의자를 가리키면서, "그것만으로도 또한 넉넉하다'고 하자 화스님은 그의 말에 따라 의자를 주었다. 14일 이른 새벽에 일어나 법당 위로 올라가 대중스님과 영결을 고하고 또다시 게송을 읊었다.
나의 전신은 본디 석교의 승려라
이 때문에 인간에게 사랑과 미움을 나누었지
사랑과 미움이 다한 때 온전한 바탕 드러나
무쇠 뱀이 불 속에서 얼음덩이를 씹는구나.
前身本是石橋僧 故向人間供肯憎
憎肯盡時全體現 鐵蛇火裡嚼寒氷
드디어 마른 나뭇가지를 소매 속에 넣고 나무더미 위로 올라가 앉은 후 스스로 불을 지펴 빨간 불길이 치솟아 올랐으나 그 불길 속에서도 태연히 향을 사르며 축원하였다.
신령한 싹은 음양의 종자에 속하지 않으니
그 뿌리는 원래 겁 밖에서 왔다오
이를 그만두고 몸소 설파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불 속에다 옮겨 심을 수 있겠는가.
靈苗不屬陰陽種 根本元從劫外來
不是休居親說破 如何移向火中栽
스님은 화스님에게 염주를 건네주면서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어 감사하다고 하였다. 이에 화염이 휩싸이는 곳마다 많은 사리가 나왔는데 주의경은 이 소식을 전해듣고 경탄해 마지않아 그를 위해 영암사에 사리탑을 세우고 시를 지어 그를 애도하였다.
3. 원(元)의 침입에 맞서 송(宋)나라 사람의 절개를 지키다
/ 가공 설옥(珂公雪屋)스님
원나라 병사가 강남 땅을 침략했을 때 금산사 현묵암(賢默艤)스님은 백안(伯顔:元將)의 협박으로 그의 막사에 머물게 되었으며 그를 따라 무림(武林)에 이르렀다. 당시 중축사(中竺寺)의 가공 설옥(珂公雪屋:石田의 法嗣)스님은 송나라가 망하자 곧바로 사원의 직책을 그만 두었다. 묵암스님은 가공스님을 잘 아는 사이며 또한 그의 도행을 존경해온 터였다. 이 때문에 백안에게 가공스님을 영은사의 주지로 승진시켜 주기를 청하고, 묵암스님 자신이 임명장을 가지고 가공스님의 문을 두드리니 가공스님은 빗장을 뽑아 얼굴을 반쯤 내밀고 물었다.
"너는 누구냐?"
"스님의 옛친구 묵암이요."
이에 가공스님은 빗장을 걸면서, "나는 너를 모른다'고 하였다. 가공스님은 비록 세속 밖에 살면서도 스스로 충절을 지켜 영은사 주지로 임명됨을 달갑게 여기지 아니하고 이처럼 단호히 거절하였던 것이다. 당시 가공스님의 문하에 한 수좌가 있었는데 그의 나이 80여 세였다. 그는 "송나라에서 태어나 송나라에서 늙은 몸으로, 송나라에서 죽을 수 없게 되었구나!' 탄식하고서 마침내 단식을 하여 죽었다.
4. 총림에 떠도는 헛소문
총림에 떠도는 소문은 모두 따질 만한 게 못된다. 후세에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대혜(大慧)스님이 불지(佛智)스님과 함께 원오( 悟)스님 문하에 있을 때 원오스님이 불지스님을 편애하여 대혜스님은 항상 그 점을 불평하였다고 한다. 뒤에 불지스님이 육왕사(育王寺)에 주지를 하다가 대혜스님이 그 자리를 이어 받았는데 물가에 있어서 좋지 않다는 핑계로 부도를 파헤쳐보니 그의 진신(眞身)이 그대로 있기에 큰 괭이로 그의 두개골을 쪼개 기름을 붓고 태웠다고 한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는 매우 참혹한 일로서, 보통 사람들도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대혜스님이 설마 그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내 일찍이 불지스님 부도탑의 비명을 읽어보니 불지스님은 사리를 봉안하였을 뿐 부도 속에 전신을 매장한 사실이 없었다.
또한 소옹(笑翁)스님이 육왕사의 주지로 있을 때 황폐한 사찰을 중수하는 일로 겨를이 없었는데, 때마침 천동사(天童寺) 주지자리가 비어서 도당성(都堂省)에서 황제의 뜻을 받들어 소옹스님을 천동사로 옮겨 임명하려고 하였다. 스님은 육왕사의 토목공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여 임명을 없었던 것으로 해달라는 서신을 재상에게 올렸는데 그 서신 가운데, "천동사가 곧 육왕사이며, 육왕사가 곧 천동사이다'하는 구절이 있었다.
소옹스님은 엄격하여 규율을 범하는 승려가 있으면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 그를 피했다. 그리고는 그가 천동사의 주지 임명을 사양하니 비방을 조장하여 결국은 "그가 십만 전으로 천동사의 주지를 샀다'는 말을 만들어 냈다. 그런데 모르는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이 이야기를 전해 내려오면서 스님을 비난하는 구실로 삼고 있다.
나는 지난날 원나라 중기 지원(重紀 至元:1335∼1340) 연간에 보복교사(普福敎寺)의 아 경문(雅景文)스님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경문스님이 소옹스님이 재상에게 올린 진필 서찰을 내보이기에 이를 보고서야 비로소 지난 날의 비방이 거짓임을 증빙할 수 있었다. 또한 "무문문집(無文文集)" 에 실려 있는 소옹스님의 행장(行狀)과 삼탑사(三塔寺)의 탑명을 읽어보니, 스님께서 천동사의 주지를 사양하는 서신의 뜻과 일치됨을 알게 되었다. 두분 스님의 도는 마치 하늘의 일월과도 같아 모두를 다 비춰주므로, 비록 말할 나위조차 없는 거짓된 비방이 스님을 더럽히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가려내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5. 자신의 안목을 잃고 후인을 그르치는 저술
/ 천뢰 선경(千瀨善慶)스님
영은사 천뢰(千瀨善慶)스님은 절우(浙, 右) 사람으로 우극(愚極智慧)스님의 법제자이다. 책 읽고 문장 쓰는 데 있어서 그 당시 인물중에 그의 눈에 차는 사람이 없었다. 일찍이 "부종현정론(扶宗顯正論)"을 저술하여 사정(邪正)을 분석하고 시비를 바로잡으니, 매우 볼 만한 책이다. 그러나 그 내용 가운데 큰스님들이 백추를 들고 불자를 세운 일들을 단순한 이야기거리로 취급하여 진(晋)대의 왕연(王衍)이 옥진미(玉塵尾) 불자를 잡고 자기 손의 색깔과 같다고 말한 것을 예로 들어 이를 증명하려 하였다. 큰스님들이 백추를 들고 불자를 세움은 깨달음을 일깨우는 일이니 어찌 작은 일이겠는가? 그런데도 천뢰화상은 이를 이야기거리로 취급하였으니 자신의 바른 안목을 잃었을 뿐 아니라 후인을 그르치고 의심을 낳았다 하겠다.
6. 염라대왕 앞에서/ 연복사(演福寺)주지 택운몽(澤雲夢)
원나라가 송나라를 멸망시킨 후 양련 진가(楊璉眞加)를 강회(江淮) 지방의 석교도총통(繹敎都總統)에 임명하고 그에게 월주(越州) 산음(山陰) 지방에 있는 남송시대의 왕릉들을 발굴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연복사(演福寺) 주지로 있던 택운몽(澤雲夢)이 진가를 따라 송 이종(宋 理宗)황제의 시신에 가혹한 행위를 하였는데 여기에는 반드시 지난날의 원한이 있었을 것이다. 운몽은 고의적으로 진가에게 아첨하기 위해서 왼발로 이종의 시신 옆구리를 또 한차례 발길질하였다. 그후 얼마되지 않아 양주(楊州) 고을에 사는 어느 한 사람이 갑자기 죽어 염라대왕 앞에 끌려 갔는데, 생각지도 않게 이승의 천자가 오신다는 기별이 왔다. 염라대왕이 명부전에서 내려와 천자를 맞이해 들였는데, 노란 수레덮개와 왼편에 깃털로 만든 일산이 즐비하고 수레며 말들이 꽉 메워 그 모습은 인간세상 황제의 의장과 다를 바 없었다. 자리에 앉은 후 얼마 있으려니 졸개귀신이 한 승려를 결박한 채 명부전 앞으로 끌고 나왔는데, 천자가 그를 질책하였다.
"내 황제의 자리에 있은 40여 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다스리는 데 별다른 잘못이 없었고 너희 불교에 대해서도 막은 일이 없으며 너와도 원수 진 일이 없었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진가에게 아부하고자 나에게 지나친 능욕을 가하는가?"
마침내 사나운 역사에게 명하여 쇠송곳으로 스님의 왼쪽 엄지발가락을 찔러 높이 꿰어 든 후 채찍을 치니, 그의 비명소리가 너무나 애처로워 코끝이 시큰하여 차마 들을 수 없었다. 잠깐 뒤 물러나왔으나 갑자기 죽은 사람은 이상하게 생각하여 그 천자가 누구냐고 물으니 어느 사람이 송 이종(宋 理宗)황제라고 하였으며, 채찍을 맞은 승려는 누구냐고 물었더니 항주 연복사 주지 택운몽이라는 것이었다. 갑자기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자 연복사를 찾아가 그 사실을 묻고 본것을 증험해 보았으니 즉 운몽스님은 왼쪽 엄지발가락에 부스럼이 생겨 고치지 못하고 이미 죽었다고 하였다.
7. 불법문중에 잘못되어가는 일을 바로잡다/ 봉산 의(鳳山儀)법사
근대 우리 선문에는 상황에 맞게 방편을 쓰되 옛사람의 묵은 발자취를 답습하지 않고 자신의 기지로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주고 불법을 구정(九鼎)*보다도 무겁게 하신 탁월한 분들이 많았었는데, 지금 그러한 스님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항주 하천축사(下天竺寺) 봉산 의(鳳山儀)법사는 원대(元代) 연우(延祐1314∼) 초에 "삼장 홍려경(三藏鴻 卿)'의 이라는 호를 하사받았으나 그 작록을 받아들이지 않고 불법문중에 조금치라도 어긋난 일이 있으면 반드시 바로 잡았다.
고려 부마(駙馬) 심왕(瀋王)이 황제의 칙명으로 보타관음(寶陀觀音)을 예배하러 가는 길에 항주를 지나가게 되었다. 그는 주머니 돈으로 명경사(明慶寺)를 찾아가 재를 올리고 많은 사찰의 주지를 위해 공양하였다. 성관(省官) 이하 여러 관아의 관리들이 직접 그 일을 감독하였으며, 서열을 정함에 있어서는 심왕을 강당의 중앙 법좌 위에 자리하고 모든 관리는 서열에 따라 법좌 위에 줄지어 앉고 사찰의 주지들은 양쪽 옆으로 앉게 하였다. 자리를 모두 안배한 후 법사는 맨 나중에 왔는데 오자마자 법좌 위로 달려가 왕에게 물었다.
"오늘의 재는 누구를 위한 재입니까?"
"많은 사찰의 주지를 공양하기 위함입니다."
"대왕께서 많은 사찰의 주지를 공양하기 위함이라 말하고서도, 이제 주인의 자리는 없고 왕 스스로 높은 자리에 앉아 모든 주지들을 양 옆으로 줄지어 앉히고 심지어는 땅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아 있는 자도 있으니, 이는 순라 도는 병졸들을 공양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예법에는 이렇지 않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황공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사과하고 곧장 법좌에서 내려와 많은 사찰의 주지에게 예의를 표한 후 손님과 주인의 자리를 나누어 모든 관리들은 양 옆의 주지가 앉았던 곳으로 물러나 앉았다. 공양이 끝난 후 왕은 법사의 손을 잡고 말했다. "우리 법사가 아니었더라면 예의를 차리지 못할 뻔하였습니다."
아! 이른바 상황에 맞게 방편을 써서 사람의 마음을 열어줄 수 있는 사람이란 봉산법사를 두고 하는 말이다.
8. 혐의 받을 행동을 미리 막다/ 허곡(虛谷希陵)스님
허곡(虛谷希陵)스님이 앙산사에서 사직하고 경산사로 부임해 가는 도중에 원주(袁州)성에 이르니 사방에서 시주하는 신도들의 돈과 폐백 등이 수북히 쌓였다. 허곡화상은 서서히 이를 거절하며 말하였다.
"내 똑똑하지는 못하나 나로 인하여 양절(兩浙 : 浙江의 옛명칭) 지방의 여러 사원에서 선문의 종지를 알게 되었는데, 경산사 주지자리가 비어 나를 부르는 뜻은 나에게 개당설법(開堂說法)을 하여 선문의 종지를 밝혀달라는 것이다. 내 어찌 가난 때문에 사람들에게 의혹을 사는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여러분이 보내주신 물건들은 도로 가져가시어 나에게 "신화엄(新華嚴)'이라는 꾸지람을 듣지 않도록 해주기를 바라오."
시자승에게 꼭 필요한 행장만을 꾸려 그를 따르도록 명하였다.
9. 봉산 일원(鳳山一源)스님의 염고(拈古)
나는 천력(天曆:1329∼1330) 연간에 호주(湖州) 봉산사(鳳山寺)에서 일원 영(一源靈)스님을 찾아뵙고, 조주스님이 오대산 노파를 시험했다는 화두를 참구했으나 깨치지 못했다. 하루는 시봉하는 차에 이 화두를 들어 물으니, 스님께서 말하였다.
"내 젊은 날 태주(台州) 서암사(瑞岩寺) 방산(方山文¿)화상의 문하에 있을 때 유나(維那)를 맡아 보면서 나 역시 이 화두를 물었더니 방산화상이 말씀하시기를, "영유나(靈維那)야, 네가 한마디 해 보아라.'하셨다. 나는 그 당시 입에서 나오는대로 "온누리 사람들이 노파를 어찌할 수 없다'고 하였더니, 방산화상은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 온누리 사람들이 조주스님을 어찌할 수 없다고 하겠다' 하였다. 나는 그 당시 마치 굶주린 사람이 밥을 얻은 것마냥, 병든 이가 땀을 흘린 것처럼 스스로 기쁨을 알았다."
이어서 말하였다.
"시자야! 너는 달리 한마디 해보아라."
나는 그 당시 인사하고 곧장 그곳을 떠나버렸다. 내 기억으로는 지난날 스님이 처음 이곳에 부임하여 상당법문을 할 때 "세존이 법좌에 오르시자 문수가 백추를 치고…'라는 공안*을 들어 설법한 후 염송하였다.
세존께서는 이것을 잘못 말씀하시고
문수도 이것을 잘못 전했으며
오늘 나도 이것을 잘못 거론했도다.
알겠는가.
한 글자를 세차례 베껴쓰면
오(烏)자와 언(焉)자는 마(馬)가 되느니라.
世尊以是錯說 文殊以是錯傳
新鳳山今日以是錯擧
會 字脛三寫烏焉成馬
그 당시 은사 축원(竺元)스님은 육화탑(六和塔)에 은거하면서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선정원(宣政院)*에서 수많은 노스님을 천거하였으나 봉산(일원)스님이 조금 나은 편'이라며 감탄해 마지 않았다.
일원스님은 영해(寧海) 사람이며 경산사 운봉(雲峰)스님이 직접 머리 깎아 준 제자인데 주지로 세상에 나와서는 방산스님의 법을 이었다. 인품이 자애롭고 참을성이 있어 남을 용납하는 아량이 있었으며 제자들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므로 스님께서 입적하자 그를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 모두가 애도해 마지않았다.
10. 불경과 장자에 나오는 몸 큰 물고기
불경에 의하면, 바다 한가운데 산 만한 물고기 한 마리가 있는데 그 등 위에는 큰 나무가 솟아 있고 밤낮없이 업장의 바람에 뒤흔들려 무어라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다 하였고, 장자(莊子)에도 북해에 곤(鯤)이라는 고기가 있는데 몇 천리가 되는지 크기를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지정(至正) 계묘년(1363)에 노아천(奴兒千)에서 왔다는 아무개의 말에 의하면, 얼마 전 그곳에 산 만한 고기 한 마리가 나타났다고 한다. 그 고기가 바다를 지날 때 물 위로 기나긴 지느러미가 보이고 등과 꼬리를 흔들면서 북쪽에서 남쪽으로 유유히 헤엄쳐 갔는데 나흘이 지나서야 그 물고기의 몸통이 보이지 않더라는 것이었다. 이른바 "몸 큰 중생의 옛날 업장에 의한 감응'이라는 것이 이러하다. 그러나 아수라왕(阿修羅王)이 큰 바다 가운데 서 있으면 키가 수미산 만하고 두 손으로 일월을 가지고 논다 하였으니, 그가 이 물고기를 보았다면 한낱 작은 물고기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세간 사람들이란 자신의 이목으로 보고 듣는 데에 막히므로 그의 이목이 미치지 못하는 그밖의 일은 모두 허황된 것이라 생각하니, 한심스러운 일이다.
11. "선문종요(禪門宗要)"의 저자에 관하여
"선문종요(禪門宗要)"는 설산 담(雪山曇)스님이 지은 책이다. 설산스님이 송 순우(宋淳祐:1241∼1252) 연간에 태주(台州) 서암사(瑞岩寺)의 방산(方山)스님에게 귀의하여 완성한 책이니 어찌 구차스럽게 이루어졌겠는가.
내 젊은 날 봉산사의 일원 영(一源靈)스님에게 공부할 때, 스님은 야참(夜參)법문에서 문득 이 "선문종요"에 대해 언급하며, "그 중에는 옛사람이 이르지 못한 경지를 들어 말한 곳이 있기는 하나 나머지는 옛사람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하셨다.
그리고는, 그 책을 내려 주면서 읽어보라고 하였다. 그후 40여 년이 지나 천의사(天衣寺) 청업해(淸業海)라는 자가 자상하게도 이 책을 중간하면서 자기도 서문을 쓰고 용장준(用章悛)에게도 서문을 써달라 하였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가, "설산스님이 남의 문집을 도용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간행했다'고 하면서 "은공단강(恩公斷江)' 한마디를 증거로 제시하였고, 게다가 이를 10권으로 분책하고 매 편마다 본문에서 한마디씩을 뽑아 제목을 붙였으니 인용하여 본문의 취지를 잃은 곳이 매우 많다. 나는 뒷 사람들이 이 책의 유래를 자세히 알지 못하고서 도리어 업해스님의 말을 긍정하여 설산스님에게 누를 끼칠까 근심한 나머지 이를 기록하는 바이다.
12. 요즘 총림의 도반관계와 사자관계
호구사 동주(東州困永)스님과 영은사 독고 붕(獨孤淳朋)스님은 같은 고향에 동문수학한 사이로서 우의가 매우 두터웠다. 동주스님이 호구사 주지로 있던 어느 날 때마침 성 안에 있었는데 만수사(萬壽寺) 주지자리가 비었다고 제방의 주지가 독고스님을 그곳에 추천하자 하였다. 당시 독고스님은 호주(湖州) 천령사(天寧寺)의 주지로 있었으므로(만수사의 주지가 되는 일은) 단계를 밟아 승진하는 것이지 결코 단계를 뛰어넘는 일이 아닌데도 동주스님은 힘을 다해 저지하였다. 그러나 독고스님은 이 말을 듣고서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 해가 지나 동주스님은 화주(化主)할 일이 있어 호주에 갔다. 그는 이에 독고스님을 만나보고 싶었지만 스스로 부끄러운 마음에 만나지 않았고, 또한 그가 자기를 헐뜯어 모연하는 일이 실패로 돌아갈까 두려워하여 일부러 그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천령사를 찾아갔다. 그러나 독고스님은 그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속히 돌아와 예를 다하여 숙소와 음식을 제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돈을 털어 모연을 돕고 그를 위하여 앞장서서 주선하며 조금도 전과 다를 바 없이 편히 대하면서 옛 우정을 나누었다. 동주스님이 호구사로 돌아온 후 깊은 밤에 방장실 치상각(致爽閣)에서 서성대며 스스로를 돌이켜, "독고는 군자이고 수영(壽永)은 소인'이라고 하였다.
내 요즘 총림에서 도반이라고 하는 자들을 살펴보니 말 한마디나 작은 잇끝으로 서로 다투며 나아가서는 서로 헐뜯고 모함하여 상대방의 명줄을 끊어놓지 않고서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 자들이 있다. 독고스님의 너그러운 우정과 동주스님의 반성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제자가 스승의 잘못을 덮어주고 스승의 훌륭함을 드러내며 옳은 일을 따르고 잘못을 저버리는 것을 효도라 하고, 스승의 선을 가리우고 잘못만을 들춰내며 옳은 일에 등을 돌리고 잘못된 일은 따르는 것을 불효라 한다. 만일 스승에게 드러낼 만한 선이 없다면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옳다. 억지로 선이 있는 것처럼 꾸며 다른 사람들이 쑥덕거리게 만들어 도리어 스승의 불선을 들춰내게 한다거나, 순종할 수 없을 경우에는 스승에게 간언해야 옳은데도 어거지로 옳은 일이라 여기고 순종하여 다른 사람들이 쑥덕거리게 만들어 도리어 스승의 비리를 들춰내게 하는 일 또한 불효라 하겠다.
내가 요사이 여러 곳의 큰스님들이 열반하는 일을 살펴보니 그 제자들이 행장을 잘 갖추어 유명한 자에게 비명을 부탁하되, 거기에는 반드시 그가 태어날 때 부모의 남다른 현몽을 기록한다거나 죽어서 화장하였을 때 치아와 염주 등이 부숴지지 않았고, 사리가 수없이 나왔노라 기록하고, 이러한 몇 줄의 문장이 없으면 큰스님이 되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변변치 못한 제자들이 바른 이치를 알지 못하고 부질없이 거짓말을 꾸며 자기 스승에게 욕을 끼치는 일이니 효도라 할 수 있겠는가? "전등록(傳燈錄)"에 실려 있는 1,700명의 선지식 가운데 사리가 나왔던 분은 겨우 14명이었으며, 적음(寂音)존자가 저술한 "승보전(僧寶傳)"에 실려 있는 81명의 선사 가운데 사리가 있었던 분은 몇 사람에 불과하였다.
무엇보다도 우리 선문에서 귀중하게 여기는 것은 오로지 종지를 통달하고 설법을 잘하는 일이다. 향상(向上)의 수단으로 사람들의 속박을 풀어 없애주는 일을, 법을 전하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나머지는 모두 지엽과 말단이다. 화장하여 간혹 육신 [諸根] 이 부서지지 않고 구슬같은 사리가 나오는 것은 평소 그의 수행이 청정했다는 증험이니 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그러나 내 두려워하는 것은 후세의 승려들이 서로서로 이러한 일을 모방하여 거짓말을 조작하고 부질없이 자기 스승을 미화하느라 그 사실을 비석에 새겨, 다른 종교 사람들이 읽어 보고 도리어 남다른 기적이 있는 스님들까지 거짓으로 의심하는 일이 생길까 하는 바로 그 점이다. 이러한 일들이 불문에 끼친 폐해는 참으로 적지 않으니 가슴 아픈 일이다.
13. 용감히 물러선 두 스님/ 동양(東暘)스님과 초석(楚石)스님
동양(東)스님이 도량사(道場寺)의 주지로 있을 때 낭승(廊僧:사원 외무를 관리하는 승려)의 무고로 선정원(宣政院)에 소송이 제기되는 일이 있었다. 선정원에서는 이 사건을 본각사(本覺寺) 주지 요암(了艤)스님에게 위임하여 그 고을 군수와 함께 그들의 잘잘못을 다스리도록 하자 요암스님은 말하기를,
"동양스님은 규율을 엄격히 지키고 대중을 엄숙히 다스리므로 그 아래에 있는 자들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자 함부로 소송을 일으켜 그를 제거하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이들이 이제 우리 무리 속에 뒤섞여 있고 관리는 한가롭게 관아 위에 앉아 동양스님을 취조하려드니, 이 일을 내 어떻게 감당하겠느냐".
하고서 곧장 남당사(南堂寺)로 물러가 버렸다.
초석(楚石)스님이 가흥(嘉興) 천령사(天寧寺)에 주지로 있을 때였다. 마침 관리가 관청을 중건하려는데 재목과 돌이 부족하여 스님들이 살지 않는 마을의 폐사(廢寺)를 헐어 필요한 물자를 충당하고자 여러 사원의 주지들과 의논하였다. 당시 초석스님은 안된다고 힘껏 말렸으나 관리가 받아들이지 않자 드디어 사퇴의 북을 두드리고 해염(海鹽) 천령사(天寧寺)로 돌아와 버렸다.
두 노스님은 모두 과감히 의리를 행하고자 높은 주지의 지위를 마치 헌신짝 보다도 더 가볍게 버렸다. 그러나 오늘날엔 자신이 화를 당하면서도 지위에 연연하여 차마 버리지를 못하니 이를 어찌하랴.
14. 동상종(洞上宗)을 지키고 전하다/ 운외(雲外)스님
운외(雲外)스님은 창국(昌國) 사람이다. 몸은 왜소하게 태어났으나 정신만은 남달랐다. 설법할 때는 정확한 비유와 방증을 들었고, 자신을 굽혀 배우려 하는 자들을 귀하게 여겨 자상하게 성취시켜주었다. 그러면서도 맹렬히 달려나가 뒤따라올 수 없는 경지에 이르러서는 매의 눈초리와 용의 눈동자를 지닌 자라 하여도 그를 엿보지 못하였으며, 동상종(洞上宗)은 그의 힘으로 전해졌다.
노년에 천동사 주지가 되자 세상의 뛰어난 선객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스님은 거만하거나 재물을 탐하거나 혼자 먹지 않았고, 시주를 받으면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후생들을 만나면 존중하고 그들이 선문을 짊어질 것을 기대하였으며, 하루 두끼 죽과 밥은 반드시 손수 발우를 들고 큰방에 가서 하였다. 스님께서 입적하신 후 남아 있는 재산이 없자 선객들이 각출하여 스님을 영결하였다. 스님의 뒤를 이은 제자로는 빙 대방(聘大方), 여 독목( 獨木), 성 우암(省愚菴), 증 무인(證無印) 네 사람이다. 그들은 종문(宗門)을 크게 하기에 넉넉한 인물이었지만 애석하게도 지위가 덕을 따라주지 못하여 그들의 법통을 전수할 자가 없었으며 무인스님 문하에만 겨우 한두 사람이 있을 뿐이다.
15. 알 수 없는 인물, 지귀자(知歸子) 온일 관(溫日觀)
온일 관(溫日觀)이라는 자는 알 수 없는 인물이다. 그의 아호는 지귀자(知歸子)이며, 어려서 서당에서 공부한 후 선림(禪林)에 들어왔다. 얽매임 없는 천성으로 도를 즐기며 작은 예절에 구애받지 않았지만 마음만은 정토에 매어두고 경황 중에라도 잠시를 잊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왕희지 서첩의 임서(臨書)와 포도나무 그리기를 좋아하여 두 가지 모두 오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가는 절마다 떠나올 때는 반드시 돈을 달라하여 주는대로 주막에 들러 혼자서 술을 마시고, 남은 돈은 길거리의 어린아이들에게 나눠주면서 이 아이들을 앞장 세워 "재상 오신다!"고 소리치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아이들은 그를 보면 모여들어 열을 이루었다. 그의 시와 게송은 이전의 것을 뛰어넘는 작품들이었으며, 후일 서호(西湖)의 교사(敎寺:天台寺)에서 입적하였는데 일설에 의하면 백담연(白湛淵)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세간의 인연을 끝마치지 않고서 어떻게 이처럼 큰 일을 마칠 수 있었겠는가?
16. 천자의 생일에 돈에 매수당한 선객을 물리치다/ 죽장 암(竹莊岩)스님
죽장 암(竹莊岩)스님은 태주(台州) 도솔사(兜率寺)의 주지다. 태어나면서부터 큰 기개와 도량이 있어 선배 스님들을 대수롭지 않게 보았으므로 그를 미워하는 자가 많았다. 전조(前朝)에서는 천수절(天壽節:천자의 생신)에 반드시 각 고을마다 여러 사찰 주지 가운데 한 사람을 뽑아 설법을 청하였다. 때마침 죽장스님이 그 일을 맡게 되자 그를 미워하던 자들이 많은 선객을 돈으로 매수하고 화두를 물어 기봉(機鋒)을 꺾어놓으려고 하였다. 이 일을 주관하는 자가 그 사실을 알고 모두 전해주었으나 죽장스님은, 집안 일은 맡은 자가 할 일이고 법좌에 올라 설법하는 일은 주지의 임무이니, 그대는 허튼 말을 지껄이지 말라고 하였다.
그 이튿날 천령사(天寧寺)에 이르러 방장실의 객석에 좌정하여 여러 사찰의 주지들과 태연스럽게 담소하다가 북소리가 울리자 가마를 타고 법당에 갔다. 많은 관리들과 공손히 합장을 하고 법좌에 올라 축향(祝香)을 끝낸 뒤 옷깃을 여미고 자리에 앉으니, 화두를 묻는 선승들이 끝이 없었으나 죽장스님은 물 흐르듯 막힘없이 답했을 뿐 아니라 그 말로 되물으니, 그들 스스로 물러나 패배를 자인하게 되었다. 이처럼 너덧 사람을 꺾는 동안 관리들은 오래 서 있는 데 싫증을 느낀 나머지 화두를 물으러 나오지 못하도록 중지시켰다. 드디어 스님은, 마치 세찬 바람이 몰아치고 우레가 진동하듯, 번갯불이 번쩍이고 별똥이 튀듯 종지와 화두를 들어 설법하니 사람들은 모두 기가 질렸으나 그만은 오히려 여유가 있었다. 설령 그를 미워하던 자에게 천만 개의 혓바닥이 있었다 하여도 스님을 찬양하는 사람을 이기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장수를 누리지 못했으니, 총림에 복되는 일이 아니다.
17. 축원(竺元)스님의 가르침을 받고/ 신 고범(新古帆)스님
황암(黃岩) 영석사(靈石寺)의 신 고범(新古帆)스님은 초년에 호구사의 동주(東州)스님을 찾아뵈었는데 동주스님은 그에게 장경각 열쇠를 맡긴 적이 있었다. 그 다음 홍복사(鴻福寺)의 축원(竺元妙道)스님을 찾아뵙고, 어느 날 저녁 방장실에 올라가 자세한 가르침을 청하였다.
"저는,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 [狗子無佛性] 는 화두를 들고 있으나 들어갈 곳이 없으니, 스님께서 가르쳐 주십시오."
축원스님이 호된 목소리로 꾸짖었다.
"밤이 깊었으니 물러가거라."
고범스님은 방에 돌아와 욕을 지껄였다.
"나를 위해 말해주지 않으려거든 그만 둘 일이지 성깔을 부리기는……."
어느 사람이 이 이야기를 전하자 축원스님은, "언젠가 스스로 깨달을 때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고범스님은 이 말을 듣고 곧 바로 크게 깨쳤으며, 세간에 나오자 축원스님에게 맨 처음 향불을 올렸다.
18. 보운사 문종주(文宗周)의 임종
보운사(寶雲寺) 문종주(文宗周)라는 자는 상산(象山) 사람이다. 교·관(敎觀)을 널리 통달하고 계율을 엄격히 지켜, 평소 사람들과 대화할 때에는 말을 못하는 사람처럼 더듬거렸으나 일단 법좌에 올라 강의를 할 때면 병에 든 물이 거꾸로 쏟아져 나오듯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임종할 때, 법좌에 올라 "십육관경(十六觀經)"을 강론하고 나서 대중들과 영결을 고하려 하니 좌우의 승려들이 말씀을 올렸다.
"스님의 뒷일을 부촉하지 않고서 어찌 입적하시려 합니까?"
"납승이 떠나려면 속히 떠나야지, 무슨 뒷일이 있겠는가?"
그러나 제자들이 더욱 간청하자 법좌에서 내려와 방장실로 돌아온 후 낱낱이 조목별로 모두 써놓으시고 합장을 한 채 서방 사성존(四聖尊: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혜지보살, 대혜중보살)의 불호(佛號)를 외우면서 회향발원(回向發願)을 끝마친 후 드디어 입적하였다. 다비를 하니 찬란한 사리가 나왔다.
19. 자상한 나의 스승, 축원 묘도(竺元妙道)스님
스승 축원(竺元)스님은 여 일암(如一菴)스님이 절서(浙西)에서 많은 책을 구입하여 태백사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일 요당(惟一了堂)에게 서신을 보냈다.
"듣자하니 일암스님이 많은 책을 사 가지고 돌아왔다고 한다. 생각해 보니 다른 일이 아니라 그저 동자승 몇을 가르치려고 하는 일일텐데. 네가 그에게 그만두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해주는 것이 좋겠다. 비유하자면 사냥개가 하루종일을 토끼를 쫓아다니다 보면 토끼 발자국이야 잃지 않겠지만 쫓는 도중에 사슴을 만나 토끼를 버리고 사슴을 쫓아가면 두 마리 모두 잡지 못해 말짱 헛것이 되고 마는 격이다."
내 경산사의 몽당(蒙堂)에서 지낼 때 서신을 올려 스승의 안부를 물었더니 손수 답서를 보내주셨다.
"그대가 몽당의 화롯불 맡에 앉아 부젓가락을 놀릴 때나 담소할 때, 국물을 먹고 찬물을 마실 때, 이 모두가 그대 자신이지 결코 다른 사람이 아니다. 단도직입적인 공부 [直截工夫] 란 결코 여기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내 생각해 보니, 스승께서는 그 당시 아마도 나를 시원찮게 여겨 매서운 주먹질이나 발길질은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처럼 간곡히 가르쳐 주신 성싶다. 바로 이것이 노란 나뭇잎새를 황금이라고 하여 어린아이들을 즐겁게 해주는 가르침인 셈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흙탕물을 뒤집어 쓰셨겠는가.
아! 스님이 입적하신 지 이미 30여 년인데 이 가르침을 적으려니 스승의 얼굴을 마주하는 느낌이다.
20. 성 도원(誠道元)스님의 「성학지요(性學指要)」
성 도원(誠道元)은 속세에 있을 때는 호석당(胡石塘) 선생에게 배웠으며, 출가하여서는 경산사 허곡(虛谷)스님에게 귀의하였다. 그는 "성학지요(性學指要)" 10권을 저술하여 큰 도움을 주었는데, 지정(至正) 병신년(1356)에 가화(嘉禾)의 고사명(高士明)이 이 책을 편집·정리하여 간행한 일이 있다. 그 당시 장사성(張士誠)이 소주(蘇州)를 점거하고 제멋대로 왕을 자칭하였는데 정명덕(鄭明德)·진경초(陳敬初)·예지진(倪之震) 등이 그를 보좌하고 있었다. 유학자들은 이 책에서 성품에 대한 회암(晦庵:朱子)의 의논은 본지를 잃은 것이라고 반박했다는 사실을 장사성에게 말하니, 장사성이 그 본판을 없애도록 명하였다.
성품(性)이란 텅비고 고요하며 아무런 조짐도 없는 것이다. 이를 어떻게 선악으로 논할 수 있겠는가? 선악을 뒤섞어 세 가지 [三品:善, 非善非惡, 惡] 로 나누고 기질(氣質)과 함께 똑같이 논하니, 도원(道元)의 논변이 참으로 옳은 것이다.
내 들어보니 우(禹:夏代의 왕)임금은 선한 말만 들어도 절을 올렸고, 안연(顔淵:공자제자)은 한 가지의 선을 얻어도 그것을 잃지 않고 가슴 속 깊이 새겼다고 한다. 오늘날 수많은 유학자들이 모두가 우임금과 안연을 높히면서도 그들과 행이 다른 것은 무슨 까닭일까?
21. 명망이 너무 높아도 문제/ 고림 청무(古林淸茂)
고림(古林淸茂:1262∼1329)스님이 보령사(保寧寺)에 주지로 있을 때 명망이 매우 높았다. 그래서 당시 큰스님이라는 자들이 그를 싫어하여 큰 절 주지자리가 비었어도 천거하려 들지 않았다. 천동사의 운와(雲臥)스님이 돌아가시자 원문청공(袁文淸公)이 당시 한림원(翰林院)에 있으면서 특별히 명주(明州) 만수장(萬困莊)의 설애(雪崖)스님에게 서신을 보냈다.
"지난날 고림화상이 호구사에 있을 때 한차례 만나본 적이 있었는데 그는 기봉(機鋒)이 준엄하고 논리가 명확하여 쇠퇴한 종풍을 일으켜 세울 만한 인물입니다. 지금 천동사에 주지자리가 비었으니 설애스님께서 한번쯤 추천해주셨으면 합니다."
저속한 무리들이 팔뚝을 걷어부치고 크게 반발을 하였으나 이를 계기로 추천자의 한몫에 끼어들 수 있었다. 그러나 선발되지 못했으니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22. 설두사 상장주(常藏主)의 게송 4수
설두사(雪寺)의 상장주(常藏主)는 횡산(橫山)스님의 제자이다. 그의 모습은 몹시 초라하고 일자무식이었으나 오로지 선정(禪定)만을 닦았다. 그가 지은 게송은 현실과 이치에 다 맞고 음률이 막히지 않아 사람들을 크게 일깨우는 점이 있었다. 그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그를 "상달마(常達磨)'라고 일컬었다.
나는 소년시절에 경산사에서 그를 알게 되었으며 지금까지도 그가 지은 게송 4수를 기억하고 있다. 즉 "철우송(鐵牛頌)"·"해문송(海門頌)"·"고순송(苦 頌)"·"식암송(息菴頌)"이다.
"철우송"은 다음과 같다.
백번 달군 화롯불 속 재빨리 뛰쳐나와
머리에 솟은 뿔 세속 티끌 멀리하고
때려도 가지 않고 당겨도 꼼짝 않으니
이번 회향에는 결코 포태 속에 들어가지 않으리.
百鍊爐中 出來 頭角 嶸體絶埃
打又不行牽不動 這回端不入胞胎
"해문송"은 다음과 같다.
업풍이 불어 산처럼 파도치니
고기잡이 늙은이들 발 붙이기 어려워라
목숨과 몸 버리고 밀치고 들어가니
옥문에 자물쇠 없는 줄을 비로소 알았노라.
業風吹起浪如山 多少漁翁著脚難
命捨身埃得入 方知玉戶不曾關
"고순송"은 다음과 같다.
자줏빛 거죽 다 벗기니 은처럼 새하얀 줄기
펄펄 끓는 솥 속에 이리저리 뒤적인다
이처럼 괴로운 마음 사람들은 믿지 않고
무심히 깨물으며 진미라고 좋아하네.
紫衣脫盡白如銀 百沸鍋中轉得身
自是苦心人不信 等閒咬着味全珍
"식암송"은 다음과 같다.
백척간두에서 방법을 묻지 않고
높은 봉우리에서 한가로히 지내는 이 몸
부서진 집 엉성하여 비바람 못가리나
내 집 사정 남에게 말하기도 난처하네.
百尺竿頭罷問津 孤峰絶頂養閒身
雖然破屋無遮蓋 難把家私說向人
23. 절노비 때문에 입은 명예훼손
/ 천뢰(千瀨)스님과 형석(荊石)스님
주지된 사람은 누구나 엄하게 노비를 다스려야 하며 수시로 좋은 말로 그들을 가르쳐야만이 자신에게 누를 끼치는 나쁜 일을 저지르지 않는다.
천뢰(千瀨善慶)스님이 가흥(嘉興) 천령사(天寧寺)의 주지로 있을 때 그의 노비가 동네 거리의 개 한 마리를 훔쳐 먹었는데 이 때문에 천뢰스님은 "개 삶아 먹은 스님[煮狗]" 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또한 형석(荊石)스님이 고소(姑蘇) 승천사(承天寺)의 주지로 있을 때 신도 집의 초청을 받고 배를 타고 가는 도중에 한 마을을 지나면서 그의 노비가 그 고을 사람의 염소 한 마리를 훔쳐 먹었는데 이 때문에 형석스님은 "염소 삶아 먹은 스님 [煮晳]" 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개를 훔치고 염소를 훔친 일들이 두 분 스님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마는 그 악명은 몸소 겪어야만 하였다. 이는 평소에 노비들을 엄격히 다스리지 못한 데에서 빚어진 일이라 하겠으니 뒷사람들은 이 두 스님의 전례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
24. 속인과 어울려 술판을 벌이다가
주지(住持)란 모든 보살이 지혜로 머무는 경계에 머물러 [住] 모든 부처님의 바른 법륜을 잘 지키는[持] 자이니, 백장스님이 소위 불자주지(佛子住持)라고 이름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요즘 들어 주지가 되어 명리를 쫓는 이들은 그들의 임무가 얼마나 막중한지 모르는 자들이다. 그런 중에는 간혹 속인들과 사귀며 먹고 마시는 일에 빠져 지내는 이도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태주(台州) 홍복사(洪福寺)의 심석산(琛石山)스님은 절 주변에 사는 속인 방공권(方公權)과 사귀면서 서로 술자리를 돌려가며 날마다 먹고 마시는 것만을 일삼았다. 그 절의 감사(監寺)인 방(方)스님은 창고 일을 맡아 보기로 승낙을 받았었는데, 방공권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그를 모함하여 못하게 하였다. 이에 방감사는 앙심을 품고 방공권을 독살하려고 방장스님의 시봉에게 뇌물을 주어 그의 차 속에 독약을 넣었다. 그러나 공권이 석산스님을 존경하여 자기 찻잔을 돌려 먼저 드리자 석산스님이 그 차를 마시고 독살되었다. 방감사는 석산스님을 독살시킨 일이 항상 마음에 걸렸는데, 어느 날 콩새 우는 소리를 들어보니 영락없이 "방감이 날죽여[方監殺我]"하는 것이었다. 이에 근심과 두려움이 더욱 심해져 마침내 병이 되었고 햇볕 보기를 겁내다가 짚을 씹으면서 죽어 갔다.
그 원인을 살펴보면, 석산스님은 자기 직분을 지키지 못하고 속인과 사귀며 그들의 말을 들어준 데서 화근이 되어 마침내는 자신의 생명을 가볍게 잃었으니 뒷사람들은 이를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콩새 [桑扈鳥]를 시골 사람들은 단마조(鍛磨鳥)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늦봄이 되어서야 운다. 세속에서는 그 울음소리를 "장감단마(杖監鍛磨:짱 찌안 뚜완 뭐)'라 하는데 이 중은 "방감살아(方監殺我:팡 찌안 싸 워)로 착각한 것이었다. 티후루 [提葫蘆]·쁘어삥찌아우 [婆餠焦] ·워뿌쿠 [脫布袴] ·니훠훠 [泥滑滑] 따위의 새는 모두 그 울음소리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25. 목을 베자 하얀 우유빛 피가 흐르다/ 합존(合尊)대사
합존(合尊)대사는 송나라의 어린 임금 영국공(瀛國公)이다. 원(元) 살선(薩禪:世祖)황제에게 귀순하자 황제는 그에게 삭발을 하고 승려가 되도록 하였는데 국사가 그의 이마를 손수 쓰다듬으며 비밀 계법을 전하였다. 그는 확고하게 정진 연마하여 이미 많은 증험이 있어왔는데, 영종조(英宗朝:1321∼1323)에 이르러 대사는 때마침 흥에 겨워 시 한 수를 읊조렸다.
임화정에게 묻노니
매화는 몇 차례나 피어왔는지
황금누대 위의 길손이여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이 몸.
寄語林和靖 梅開幾度華
黃金臺上客 無復得還家
첩자가 그 시의 의도는 강남 인심을 격동시키려는 데 있다고 참소하자 황제는 그를 목 베어 죽였는데 스님의 목에서 우유빛 피가 흘러 넘쳤다. 황제는 그제서야 뉘우치고 내탕(內帑) 황금을 출연하여 소조상을 세우고 강남 지방의 글씨 잘 쓰는 승려와 선비를 연경(燕京)에 불러들여 대장경을 서사하여 그의 명복을 빌어 주었다. 그러나 황제는 초여름에 상도(上都)로 가는 도중 더위를 피하다가 시해 당하여 새로 서사하는 대장경을 절반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26. 환생한 어린아이
지정(至正) 신축년(1361)에 섬서(陜西) 지방의 민가에 한 어린아이가 있었는데 겨우 세 살이었다. 어느 날 마을 거리에서 "현관(縣官) 행차에 길 비켜라' 하는 소리를 듣고서 앞길을 막아선 채 현관의 이름을 부르면서 예의를 표하며 말하였다.
"서로 헤어진 지 오래인데 지금까지 별일 없었소?"
현관은 깜짝 놀라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이 어린아이가 어떻게 나의 이름을 알고 있단 말인가?"
이에 어린아이 앞으로 나아가 물어보자 어린아이는 전생(前生)의 성명을 말하고 이어서 예전에 함께 주고 받으며 읊조렸던 시 몇 수를 열거하자 현관은 그때서야 옛 친구임을 믿게 되었다. 그는 다시 현관에게 말을 이었다.
"그대와 헤어진 뒤 이제 사람의 몸으로 환생하였으나 앞서 세 차례나 태어난 바 있다. 처음 죽어서는 개로 태어나 스스로 싫증을 느낀 나머지 일부러 주인집 아이를 물었는데 주인이 화가 나서 나를 죽였고, 다시 메추리로 환생하였으나 그것도 싫증이 나 강물에 빠져 죽었는데 이제 사람으로 태어나 그대와 다시 만난 것이 참으로 다행이로다."
듣자하니, 이 아이는 전생에 주역의 이치를 즐겨보며 "태극이 움직이기 전 [太極未動]"의 경지를 체험한 까닭에 삶과 죽음을 넘나들면서도 생사에 매이지 않았다고 한다. 마의(麻衣)스님이 주역을 "심역(心易)"이라 하였고, 자호(慈湖)스님은 이를 "역(易)"이라 이름했는데, 거기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27. 보(寶)상좌의 사리와 피고름/ 파암(破菴)스님
파암(破菴祖先)화상이 자복사에서 물러나 경산사 몽암(蒙菴)스님의 부름을 받고 그곳을 찾아가니, 몽암스님은 그에게 입승수좌(立僧首座)의 직책을 맡겼다. 그곳의 보(寶)상좌는 큰 지견을 갖춘 인물이었으며 주지나 수좌가 부임하여 개당법문을 할 때면 으레 느닷없는 선기문답으로 그들의 기봉(機鋒)을 꺾곤 하였다. 어느 날 파암스님이 법좌를 열었는데 보상좌가 왔다.
"천지의 안, 우주의 사이 그 중간에 있다."하면서 파암스님이 말씀하시자 보상좌가 무어라 말하려다가 파암스님에게 얻어 맞고 쫓겨나왔다. 당시 보상좌는 파암스님의 말이 끝난 다음 앞으로 나가 반박하려 했었는데 이미 "그 중간에 있다.'라는 부분에서 얻어 맞고 쫓겨나오자 파암스님이 고의로 자신을 꺾으려 했다고 생각하고 자기자리로 돌아가 죽어버렸다. 화장을 하고 나서 고향 사람들이 사리를 거두어 파암스님에게 드리자 파암스님은 그것을 들고 말하였다.
"보상좌야! 너에게 설령 여덟 섬 네 말의 사리가 나왔다 하더라도 그것을 한쪽 벽에 던져 놓겠으니 내 생전에 한마디 [一轉語] 를 돌려다오!"
그리고는 사리를 땅에 던지자 오직 보이는 건 피고름 뿐이었다. 이 이야기는 선배에게서 들은 것이다.
28. 스스로 자초한 응보/ 장구육(張九六)과 방국진(方國珍)
원 지정(元 至正) 병신년(1356)에 장사성(張士誠)이 소주(蘇州)성을 공략했을 때 그의 아우 구육(九六)이라는 자가 맨 먼저 입성하여 살 집을 물색하다가 승천사(承天寺)가 그윽하면서도 밝은 것을 보고서 내심 좋아하였다. 그곳을 궁실로 개조하고자 병사에게 법당의 불상을 부수도록 하였으나 병사들은 벌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그 누구도 감히 명을 따르지 않았다. 이에 구육이 화가 나서 불상의 얼굴에 활을 쏘아 맞힌 뒤 다 부숴버리고 장사성을 맞이하여 그곳에 살았다. 그 이듬해 정유년(1357)이 되자 명나라의 많은 병사가 여구(呂口)의 황태(黃 )를 공격하니 구육이 병사를 거느리고 출전하였으나 패배하여 포로가 된 후 오른팔을 잘리고 죽었던 것이다.
무술년(1358) 방국진(方國珍)이 강절성(江浙省)의 분성참정(分省參政)이 되어 명주(明州)를 수비할 때였다. 그의 좌우사관(左右司官) 유인본(劉仁本)이 문학을 몹시 좋아하여 평소에 지은 문장과 시를 편집·간행할 때 성 중에 있는 사찰의 장경을 가져다가 이를 풀칠하여 표지를 만들고 경문을 지워 없앤 후 자기의 시와 문장을 베껴쓰니, 우리가 보기에도 뼈에 사무치게 마음 아팠으나 어찌할 수 없었다. 오(吳)의 원년(1359)에 군대가 명주를 점령하여 방국진이 조정에 항복하자 유인본이 충성하지 않는 죄를 논하여 그의 등을 채찍질하니 등이 터지고 창자가 드러난 채 결국 죽고 말았다.
구육은 하나의 용사에 지나지 않으므로 죄복(罪福)의 응보를 알지 못한 자이니 그래도 용서할 수 있다 하지만, 유인본은 공자의 학문을 배우고서 차마 이러한 일을 자행할 수 있었을까? 공자의 말에 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