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語西話 上
내가 고질병을 치료하던 여가에 질문을 던지는 객승이 있어, 그 질문에 응답한 것이 모여 한 책이 되었으니 그 제목을 「산방야화(山房夜話)」라 했다. 그러나 이 책은 그저 일거리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가져갈만한 것이다. 그런데도 이 「산방야화」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끊이질 않아, 그때 그때 일어났던 느낌들을 말하다 보니 모두 20여 편의 책이 되었다. 그래서 제목을 「동어서화(東語西話;이런 말 저런 말)」라고 했는데, 책 이름을 그렇게 붙인 이유는 조리있게 체계적으로 서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감히 깨달으신 선배에게는 들려줄 것이 못 되고, 후학들에게나 겨우 보여줄만 하다.
마음이 부처라는 말의 참뜻은 무엇인가?
아주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볼 수 없는 것이 얼굴이고, 아주 친한 듯 하지만 알 수 없는 것이 심성(心性)이다. 얼굴은 직접 볼 수 없다 해도 거울에 비추면 볼 수 있다. 그리고 심성은 그냥 알 수는 없지만, 투철하게 깨달으면 알 수 있다. 투철하게 깨닫지도 못하고 심성의 심오한 이치를 알려는 것은, 마치 거울을 버리고 자기의 얼굴을 보려는 것과 같다.
옛날에 대매산(大梅山)에 머물던 법상(法常;752∼839)스님이 마조(馬祖;709∼788)스님에게 묻기를, "부처님이란 무엇입니까?"하자, "마음이 부처님이다〔卽心是佛〕"고 대답했다. 그러자 법상스님은 이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열 개의 태양이 일시에 비추듯 모든 미망과 번뇌가 한 순간에 사라졌다. 그리고는 바로 대매산(大梅山)으로 가서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곳에 자신을 한결같이 맡겨버렸다. 이것이야말로 투철하게 깨달은 좋은 본보기이다.
이로부터 `마음이 부처이다'고 한 말이 온 세상에 퍼졌으니, 이것은 현묘함을 참학하는 상근기 인재뿐만 아니라 일개 장사치·부엌데기·아녀자까지도 말할 때면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라는 말을 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막상 "마음이 무엇이냐?"고 다그쳐 질문하면 망연하여 아무 것도 모른다. 이런 무리들은 그만 두고 말하지 않더라도, 더러는 평소에 참선공부 한다고 자처하는 수행자들이 그 심체(心體)를 노래하고 읊조려 지적하기를, 마치 얼굴이 거울 속에 선명하게 비추듯이 분명하게 한다. 그러나 법상스님이 도달한 경지에는 좀처럼 미치지 못한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될까? 법상스님은 투철하게 깨달은 것이고, 그밖의 사람들은 다만 알음알이로 이해한〔情解〕 것이다. 그저 알음알이로 이해한 사람은 말은 오히려 교묘할지 몰라도, 그 종지(宗旨)에는 도리어 어두우며, 말이 기묘하면 기묘할수록 이치는 더더욱 혼미해진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얼굴을 비출 거울은 구할 수 있지만 심성을 밝히는 말씀에 관한 요점을 들어보질 못했읍니다" 그래서 내가 대답했다. "다만 불성〔性〕은 마음에 있는 것이니 깨달음은 어려울 것이 없읍니다. 혹 이것을 믿지 않는 이라면 깨달음의 원인〔因地〕이 없으므로 스스로 깨달는 것〔果覺〕도 없을 것입니다." 옛 사람들의 <믿음>은 누가 믿음을 내라고 꾸짖고 지도해서 그랬던 것도 아니며, 또 <믿음>을 내라고 권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오직 믿음이 마음에서 우러나왔으니, 마치 굶주린 자가 음식 찾듯이 생각생각에 잠시도 쉬지 않고 알음알이와 사량분별을 싹 쓸어내어 철벽같은 믿음을 굳건히 하였다. 그러다가 하루 아침에 눈 밝은 종사(宗師)의 기연(機緣)을 만나 깨달음의 문이 툭 터지면 마치 오랫 동안 잊었던 것을 홀연히 기억한 것과도 같았다. 이것이 바로 법상스님이 마조스님의 질문이 끝나자마자 그대로 그 자리에서 대답한 소식이니 어찌 우연히 그랬겠는가!
요즈음 사람들은 투철하게 깨닫지도 못했으면서도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라는 말을 지껄이며, 알음알이의 허망한 분별로 이리저리 때도 없이 지껄인다. 이래서야 그저 말만 많아질 뿐 <마음>과 <부처>에 계합할 이치가 있겠는가!
생사대사가 왜 중요한가 ?
참선하는 사람치고 생사(生死)의 일이 크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막상 `무엇을 생사라 하는가?'라는 질문을 받게 되면 망연하여 의례 대답을 못하고 만다. 어떤 사람이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읍니다"고 해서 내가 넌즈시 그에게 일러주었다.
"그대는 생사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생사문제의 해결을 위해 발심한다 하니 참으로 허망합니다. 생사의 일은 인간에게는 큰 문제입니다. 실로 생사의 이치를 알지 못하면서 참선을 한다는 것은 마치 농사일을 버리고 생식〔 穀〕하는 사람에게 농사를 지으라고 억지로 시키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그러나 벽곡으로 이미 배고픔을 잊은 그는 벼나 기장을 심을 필요가 없으므로 명령을 따르지 않고 게으름만 피웁니다. 이와 같이 참학을 하는 자가 생사의 단서부터 미혹되면 참학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읍니까?
어떤 사람은 `태어나도 오는 곳을 모르며, 죽어도 가는 것을 모른다. 이것을 생사라고 말한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이지 미친 소리입니다. 가령 오고 가는 곳을 안다 해도, 그가 알고 있는 것이 바로 생사인데 생사 자체에 빠져서 생사를 벗어나는 경우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름지기 다음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생사는 원래 체성(體性)이 없는데 인간이 스스로의 마음을 미혹시켰기 때문에, 허망하게 윤회를 아서 한 생(生)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이 추우면 응결하여 얼음이 되지만, 그 추위가 사라지면 다시 물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미혹이 마음에 축적되면 생사가 허망하게 응결되지만, 미혹했던 것을 깨닫고 나면 마음의 작용은 고요할 뿐입니다. 생사를 찾으려 하나, 마치 졸다가 깨어난 사람이 꿈 속에서 있었던 일을 찾는 것과 같읍니다. 어떻게 그것이 현실에서 가능할 이치가 있겠읍니까?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생사란 본래 공(空)한 것이지만 그것을 알려면 깨달아야만 하고, 본래 열반(涅槃)이 있지만 미혹되면 알지 못한다는 것을.
혹 자기의 마음을 투철하게 깨닫지 못했는데도 생사문제를 환히 깨달으려 한다면, 이것은 마치 장작불을 계속 때면서 가마솥의 물이 끓지 않기를 바라는 것과 같읍니다. 그런 이치가 어디 있겠읍니까? 생사를 환히 깨닫는 데에는 마음을 깨닫는 것보다 가까운 길이 없고, 마음을 깨닫는데도 발심(發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읍니다. 그러려면, 추위와 더위를 모두 잊고 침식(寢食)을 그만두며, 알음알이〔情〕와 허망한 생각〔妄〕을 비워야 합니다. 그런 일념(一念)을 어떤 곳에서든 꾸준히 하여, 마치 견고한 무기나 침범되지 않는 엄중한 성곽처럼 굳게 지켜야 합니다. 동시에 옛 사람들이 말했던 확고한 발심을 두루 살펴 그와 같이 하기를 조심해서 노력한다면 확철대오하는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이미 깨닫고 나면 생사만 공적(空寂)한 것이 아니라, 열반도 그러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생사와 미망(迷忘)이 교대로 결합하여 멀리는 광겁(曠劫)으로부터 미래제(未來際)에 이르기까지 털끝만한 사이도 없이 유전(流轉)하겠읍니까? `생사는 큰 일이다'고 말하는 것이 왜 헛된 말이며, 어찌 빈 말이겠읍니까?'
환법의 정체란 무엇인가 ?
독사와 호랑이에게는 사람을 해치려는 생각이 본래부터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높은 산허리를 의지하고 평평한 땅바닥에 누워 있다. 그런데 길가는 사람들이 오히려 그들을 무서워하여 서로 주의를 주며 멀리 한다. 이는 그들이 사람을 물어뜯고, 또 독이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그들의 그림자만 보아도 피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보살이 환법(幻法)을 대하는 것도 이와 같다. 무엇이 <환법>인가 하면, 실제는 없는데 있는 듯한 것이다. 이미 실체가 없다고 말했는데, 도대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이것은 허공에는 본래 미세한 먼지도 없는데, 눈병에 걸린 사람은 허공에서 어지러운 헛꽃〔空華〕을 보는 것과 같다. 허깨비인 줄 아는 사람은 자기의 눈병을 탓하겠지만, 허깨비인 줄 모르는 사람은 도리어 헛꽃만을 탓한다. 그밖에 물에 어린 달그림자와 거울 속에 비친 형상도 실제로는 모두가 헛된 존재이다. 그런데도 미혹한 사람은 그것을 <있다>고 집착하면서 그저 그것을 없애려고 한다. 더구나 그러면 그럴수록 더더욱 무언가 <있는> 듯 해진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은 그것이 허깨비인 줄 알고 없애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일부러 없애려 하지 않아도 그것은 저절로 없어진다.
그러므로 경전 중에서 `허깨비인 줄 알면 그대로 없어지니 따로 방편을 쓸 필요가 없다'고 하는 대목이 있는 것이다. 허깨비인 줄 아는 그 <앎>은 알음알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담박에 깨치는 마음 바로 그 자체이다. 그 <앎>은 지극히 당연하기 때문에 허깨비가 없어지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진다. 그러므로 일부러 방편을 만들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허깨비를 없애려는 마음이나 없애려는 대상이 모두 방편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마음자리를 통철하게 깨달아서 모두가 허깨비인 줄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그렇게 확실히 알기만 하면 허깨비는 저절로 없어지므로, 없애고 말고 할 것이 없게 된다. 이것은 마치 뱀과 호랑이를 보기만 해도 피하는 것과 같다. 그들이 사람을 물어뜯고 독이 있다는 것을 알아서 자연히 그들을 멀리하기 때문이다. 어찌 따로 방편을 써야만 환법(幻法)이 사라지겠는가?
참된 깨달음이 없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4대5온(四大五┃)은 허깨비'라고 모두들 말한다. 그러나 잠시라도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부딪치면, 갑자기 알음알이가 발동하여 갖가지 허깨비가 생겼다가는 없어지곤 한다. 갖가지 고통을 모두 맛보고 마음에 싫증이 나서 그것들을 없애려고 하지만, 허깨비같은 견해〔幻見〕만 더욱 증가할 뿐이다. 더구나 허깨비가 생기게 된 모든 인연을 올바르게 알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그것을 없앨 수가 있겠는가?
수행을 잘하는 사람은 허깨비를 없애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오직 자기의 공부만 부지런히 할 뿐이다. 자기의 마음자리만 깨달으면 백 천이나 되는 허깨비의 허망이 녹아져 진실하고 고요한 상태로 돌아간다. 이 때는 <떠난다>고 한 그 말마저도 오히려 부질없는 군더더기가 될 뿐이다.
말로써 성품을 깨칠수 있는가 ?
묘희 대혜(大慧;1088∼1163)스님은 말씀하시기를, "옛 사람은 모두가 마음을 밝혀서 성품을 보았는데, 요즘 사람들은 의례히 말로써 마음과 성품을 설명하려 한다. 너희들이 알아듣도록 잘 가르칠 것이니, 삼십 년 후에 내가 말했던 것을 검토해 보라"하였다. 이런 지극한 말씀이 없다고 해도 교화는 날로 쇠퇴하고 인심은 날로 쇠락해 갔다.
무엇이 견성(見性)인가 하면, 다름이 아니라 수행하여 본래의 자리에 도달한 것이다. 성품을 말로 설명한다는 것은 수행은 하지 않고서 본래의 자리에 도달한 듯이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황제가 사는 서울에 천하의 빼어난 인물들이 모이는 것과 같다. 다른 지방·다른 나라에 사는 보잘 것 없는 어린애나 더벅머리 총각도 서울이 있는 방향은 가리킬 수 있다. 다만 그들은 직접 가보지 못했을 뿐이다. 아직 가보지 못했기 때문에 `말로만 하는 자'라고 하는 것이다. 서울에 대한 말이 많을수록 설명은 더더욱 복잡해진다. 그러므로 제대로 발심한 사람이라면 어찌 그 말에 의지해서 서울 사정을 알려고 할 것이며, 더구나 실없는 말이나 연구하여 헛된 것을 찾으려는 선승이 되려 하겠는가? 발심한 사람이라면 반드시 양식을 준비하여 튼튼한 신발을 신고 천 리나 먼 길이라 해도 서울을 향해 고생을 무릅쓰고 꾸준히 걸어갈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몸소 서울에 도착하면 화려한 대궐과 많은 인파, 번화한 문물과 엄청난 부귀를 직접 보게 된다. 이래야만 비로소 직접 서울을 본 사람이라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직접 본 사람이라야 고향에 되돌아 가서 서울의 사정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동쪽을 서쪽이라 하고, 훌륭한 것을 억지로 천한 것이라 하며, 종일토록 자기 멋대로 말하더라도 결코 그가 몸소 보았던 진실만은 분명한 것이다. 이것을 두고 나는 `법왕(法王)은 법에 자재(自在)한 분이다'고 한다. 몸소 도달해서 본 사람과 도달하지 못하고 말로만 설명한 사람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말로만 설명하려 했던 경우의 원인은 무엇보다도 뽐내려는 마음이다. 대체로 말로만 하는 자는 천부적인 자질이 준수하고 민첩하여 많이 듣고 널리 기억하는 사람이다. 그러한 버릇이 알음알이를 움직여서 알음알이를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된다. 알음알이는 그의 뽐내는 행위를 더더욱 부추기고, 뽐내는 마음은 알음알이를 더더욱 빛나게 하여 말을 하면 할수록 사생(死生)의 결박은 더욱더 견고해진다. 그러나 몸소 본 사람은 종일토록 아무 말하지 않아도 그의 진실한 음성은 우주에 가득 찬다. 그래서 영가(永圈;647∼713)스님은, "말없을 때 말을 하고, 말을 할 때 묵묵하라. 크게 베푸는 문을 열어 놓으니 막힘이 없다"고 하셨다. 그 가르침이 이와 같은데 무엇 때문에 사람들을 속였겠는가? "삼십 년 뒤에 이 말을 검토해 보라"고 한 그 말씀이 없었던가? 대혜스님의 이 말씀을 칭찬해야 할는지 깎아내려야 할는지. 이 소식을 아는 사람이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비오듯 할 것이다.
병고가 양약이 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
부처님께서는 "중생에게 병고는 훌륭한 약이다"고 하셨다. 이 말씀을 믿어야 할지, 믿지 말아야 할지. 도대체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 중생은 오랫동안 미망(迷妄)을 쌓아왔기 때문에 안으로는 아상(我相)이 생기고, 밖으로는 대상에 집착한다. 단지 몸과 마음이 쾌적하고 편안한 상태에 도달한 것만을 뽐낸다. 그 결과 알음알이가 어지럽게 뒤섞여서 허깨비같은 육신은 언젠가 늙고 병들어 죽게 된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만다. 섭생해서 건강을 유지하다가 방법이 잘못 되어 어느날 갑자기 자리에 누워 신음하게 되면, 아무 일도 못하고 때도 없이 고통이 찾아와 머지 않아 죽게 된다. 지난 날을 돌이켜 볼 때 도(道)도 깨닫지 못하고 의지할만한 법력도 없어서 아득한 3계(三界)에 끝없이 들락거리게 된다. 혹 그러다가 구차하게라도 목숨을 연명할 수 있게 되면 이를 악물고 뼈를 깎는 고행으로 도를 탐구하기를 밤낮으로 쉬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출가(出家)했던 본 뜻을 살리고, 불조(佛祖)의 깊은 은혜에 보답하리라"고 맹세한다. 이처럼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병고가 진실한 양약'이라는 본 뜻을 아는 사람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렇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도리어 병을 앓으면서도 자기에게 좋거나 싫은 상황을 사량분별(思量¿別)하여 애증만 더 두터워진다. 불조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면서도 자기가 지어온 업(業)을 되돌아 보지 않는다. 이렇게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사람은 깨달음을 구하는 무리가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불조의 진실한 말씀을 허물되게 만들 뿐이다.
그러나 실제로 병고는 병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좋은 약이 되는 것일뿐만 아니라,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게도 훌륭한 약이 된다. 왜냐하면 피차 몸은 4대(四大)에 구속되어 있고, 형체는 외연(外緣)을 의지했기 때문이다. 남들의 병이 저와 같은데 나인들 어떻게 그렇지 않겠는가? 지금은 요행히도 병이 없어 몸이 쾌적하고 편안하지만, 순환하는 8고(八苦) 속에서 건강을 자신할 수 있겠는가? 건강할 때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이 부지런히 도를 닦아 번뇌의 울타리를 부수고, 무명(無明)의 소굴을 분쇄하며, 열반까지의 험난한 함정을 텅 비우고 생사의 빠르게 돌아가는 흐름을 끊어야만 한다. 마음 밖에서는 도를 구하지 못하는데, 깨달음〔佛〕을 어떻게 다른 것에서 얻을 수 있겠는가?
위와 같이 생각하다면 좋은 약의 효과가 어찌 병든 사람에게만 있다고 하겠는가? 무릇 생명이 있는 존재라면 모두 이 말씀에서 신비한 효험을 얻을 것이다. 그런데 더구나 우리들은 삭발출가해 선문총림(禪門叢林)에 살면서 걸핏하면 생사의 일로 평생의 업을 삼는다고 말은 한다. 그러나 `병고가 바로 양약이다'는 밝은 가르침을 듣고서도 조금도 반성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끝없이 윤회전생(輪回轉生) 하리라는 것을 미리 알 수 있다.
사찰을 잘 보호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
한 손님이 말하기를, "속인이 교묘한 방법으로 이웃 사찰의 살림을 빼앗은 자가 있었읍니다. 절의 스님들은 백방으로 힘을 써보았으나 절을 찾지 못했읍니다. 그래서 관청에서 이 문제를 다스려 주길 바랬으나 절도 찾지 못하고 수고로움만 겪었읍니다"고 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당신들은 세간 밖에 노니는 출가한 사람들입니다. 반드시 자신의 몸뚱아리를 잊고 물욕을 비워 이치로써 자신을 관조해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속인들의 취사(取捨)에 집착하는 꼴을 본받읍니까?"하였다.
옆의 객승이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읍니다. 예로부터 `천 년간이나 상주(常住)하는 사찰이요, 하루 아침 살다 가는 스님이다'는 훈계가 있읍니다. 그러나 하루 살다 가는 승려가 아니라면 누구라서 천 년을 상주하는 사찰을 보호하겠읍니까?"
다시 어떤 사람이 말했다..
"내가 들은 것은 이와 다릅니다. 변하지 않는 것을 상(常)이라 말하고, 움직이지 않는 것을 주(住)라 합니다. 이것은 진실하고 고요한 법신(法身)의 본체를 두고 한 말입니다. 참된 것은 변하지 않으며, 고요한 것은 요동하지 않읍니다. 참되고 고요한 상주물은 대천세계(大千世界)를 모두 포섭하여 어느 것도 본체를 벗어난 것이 없읍니다. 그러므로 옛날 가르침에도 `이 법은 진여〔法位〕에 안주하여 세간의 모습이 상주한다'고 하였읍니다. 우리들이 속세에서 분주히 돌아다녀 부귀영화를 얻으려고 걸핏하면 알음알이를 쓸데없이 일으키니, 이것을 모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대는 출가하여 깨달음을 구하는 수행자입니다. 상주물은 참되고 고요한 법신의 본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면, 어떻게 중생을 인도하고 교화를 행하는 부처님의 제자가 되겠읍니까? 옛날의 보살은 6바라밀을 수행하고 4무량심(四無量心)을 베풀어 행동을 삼가하고, 착한 일을 몸소 행하는 것이 사찰을 보호하는 일이라 생각했읍니다. 그대는 하루 아침 살다 가는 승려로서 사찰을 보호하려 하니 착하다고는 하겠읍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정념(正念)을 버리고 취사(取捨)의 알음알이에 빠져 싸움질하고, 혈기만 믿고 빼앗긴 땅과 살림살이를 찾으려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진실하고 고요한 법신을 미혹하고 사찰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큰 잘못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그대가 이것을 뉘우쳐 고치지 않고 다만 미친 감정으로 세속의 풍습을 본받아 천년 토록 계속될 사찰을 보호하려 한다면, 이는 마치 제방을 터놓고 물이 새지 못하도록 하는 것과 같은 짓입니다. 이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일 뿐입니다. 그대는 보지 못했읍니까? 세간에 나는 듯한 누각이며, 용솟음치는 듯한 전각을. 모든 장엄구(藏嚴具)가 대천세계에 충만했는데, 만약 그것이 부처님께서 원해서 그렇게 되었다면 외도(外道)라 해도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보살이 보시를 행할 때는 자신의 머리·눈·골수·뇌 등을 보시해도 아까와하는 기색이 하나도 없다고 들었읍니다. 보살은 3륜(三輪)*이 모두 공적하여 한 생각도 집착이 없읍니다. 인간과 천상이 봉헌한다 해도 오히려 `내가 보시를 받는다'는 마음이 없는데, 어찌 보살에게 베풀 대상이 있다는 생각을 하겠읍니까?
참되고 고요하다는 것은 법신의 본체를 말한 것이고, 항상하여 요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법신의 모습을 밝게 나타낸 것입니다. 이런 자세를 가져야만 진정으로 상주물인 사찰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감정을 멋대로 하여 관청에게 다스려주기를 바라겠읍니까?"
그러자 객승이 말했다.
"분명 이와 같다면 당신에게는 가능할 수도 있읍니다. 그러나 사건이 공적인 문제에 걸려 있을 경우, 어찌 그런 일을 앉아서 바라보기만 할 수 있겠읍니까?"
다시 어떤 사람이 말했다.
"그대는 한갖 구제라는 말만 알았을 뿐, 정작 구제해야 하는 까닭은 알지 못했읍니다. 아녹다라 삼막삼보리인 제일의제(第一義諦)를 깨달아 거기에 의지해서 사찰이 건립되는 것이고, 사찰은 6도(六度)·4무량심(四無量心)·만행(萬行)·중선(衆善)을 바탕으로 해서 잘 운영되는 것입니다. 이들을 떠나서 구제하는 이유를 따로 찾으려고 하면, 다만 업륜(業輪)만 도울 뿐입니다. 비록 구제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해친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았더니 진실한 법신의 상주는 사찰과 표리의 관계가 되어 하나가 되어 억만 겁이 지나도록 변동이 없는데, 어찌 천 년만 가겠읍니까?" 얘기가 이쯤 되자 듣던 사람들이 모두 머리를 끄덕였다.
신광이란 무엇인가 ?
깨달음의 당체(當體)는 매우 밝아서 우주의 어디에나 가득찼으며, 너무도 눈부시게 색(色)과 공(空) 모두에 사무쳤다. 그러나 그 모습은 볼 수가 없으며 자취도 찾을 수 없다. 푸르지도 누렇지도 않고, 그렇다고 길거나 짧지도 않다. 그것은 근기에 따라 감응한다. 그리하여 설산(雪山) 한 밤중의 샛별이 되기도 했으며, 용담(龍潭;1423∼1500)스님의 꺼버린 촛불이 되어 비추는 본체는 조금도 이지러지지 않기도 했으며, 동평(東平; )스님의 깨버린 거울이 되기도 했고, 비아리성(毘耶離城)에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되어 오랜 동안 본체에 접촉하여 그 본체와 떨어지지 않아 아침 내내 눈에 가득하여 눈이 멀기도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이른바 신광(神光)이라는 것이다. 고덕스님은 "신광이 홀로 빛나니 만고의 아름다운 법이다.이 문에 들어오면 알음알이를 간직하지 말라"고 하셨다. 여기서 `홀로 빛난다'고 한 뜻은 한몸〔一體〕으로서 둘이 아니라는 뜻이다. 싱그럽고 광채로운 깨달음의 당체여! 하늘에 있으면 하늘과 동일하고, 땅에 있으면 땅과 동일하도다. 그것은 텅 비어 만상을 머금었고 훤출하게 10허(十虛)를 관통하였다. 붉은 비단 장막 속에 옥구슬을 뿌리고, 무쇠 눈 구리 눈동자로도 그 비슷한 것조차 엿볼 수 없다. 고목(奇木)이 서 있는 바위 앞에서 길을 묻지만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빨리 지나가니 누구라서 그 시작과 끝을 분간하겠는가?
`신광은 가리거나 감출 수 없다'고 하니, 산호(珊瑚)는 가지마다 달을 지탱하였다. 또한 `신광은 혼람(混濫)하지 못한다'고도 말하니, 부상(扶桑)에서는 밤마다 일륜(日輪)이 붉었구나. 그러나 이 신광은 하늘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땅에서 용솟음친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안에서 나온 것도 아니요, 외부에서 온 것도 아니다. 이 신광에 의지하여 조화(造化)가 부려지고, 이를 말미암아 만물이 생겨난다. 모든 것을 성취하지만, 어느 것에 의해서도 성취될 수 없는 것이 이 신광이며, 일체를 덮을 수 있으나 어느 것에 의해서도 덮여지지 않는 것이 이 신광이다. 반야(般若)는 중생심(衆生心)으로써 깨달을 수 없지만, 신광으로는 깨달을 수 있다. 또한 진여는 다른 것에 섞여지지 않지만 신광은 다른 것과 섞여진다. 서쪽 조사가 칼을 잡으면 부처가 와도 목을 베고, 마구니가 와도 목을 벤다. 그러나 목을 벨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이 신광이다.
도인이 가는 처소에는 불이 얼음을 녹이는 듯하고, 납승(納僧)의 앞길은 험난하여 길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그대가 이렇다 하면 나는 이렇다 하지 않으며, 그대가 이렇지 않다 하면 나는 이렇다고 하리라. 화살이 시위를 떠나지 않았는데도 과녁에 적중하였고, 여의주가 독 안에 있는데도 허공을 비춘다. 이는 모두 신광이 붙은 것으로서, 다른 방법에는 의지하지 않는다. 천하의 참선하는 사람이 말 밖에서 확연히 깨닫지 않고 알음알이〔知解〕로써 나의 빛나는 신광의 요지(要旨)에 계합하려 한다면, 마음은 날로 수고로와지고 공부는 매일같이 후퇴하리라. 이것을 조심하지 않아서 되겠는가?
복과 재앙의 근원은 무엇인가 ?
산을 옮기는 것도 가능하며, 방위를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한 번 정해진 업(業)은 피할 수가 없다. 보연(報緣)의 업은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선과 악이다. 선하면 복으로 보답하고, 악하면 화로 보답한다. 복과 재앙이 동일하진 않지만, 모두 보연에 속하므로 모두 업이라고 이름한다. 업으로 정해진 이치〔¿〕는 길가는 사람이 만나는 경계와 같다. 30 리에 다리〔橋〕 하나, 50 리에 점포 하나를 기준으로 하고 다다른 이수(里數)에 의해서 다리와 점포를 설치한다. 이것은 성현이라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선악의 생각은 하늘에서 내려온 것도 아니고 땅으로부터 솟아난 것도 아니다. 한결같이 미망(迷妄)의 정(情) 때문에 제 스스로 결박을 했을 뿐이다. 3세(三世)와 오랜 세월을 통해 인연 때문에 만나는 복과 화는 마치 30리를 가서 다리를 만나고 50 리를 가서 점포를 만나는 것처럼 털끝만큼 착오가 있을 수 없다. 세상 사람들은 어진 사람이 요절하고, 포악한 사람은 도리어 장수하고, 거역하는 자는 길하고, 의로운 자는 흉한 것만을 볼 뿐이라고 한다. 그래서 옛날에 지었던 것을 지금에 받고, 지금에 지은 것은 후세에 받는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이를 두려워하여 업을 짓지 않을지언정, 오는 과보를 받지 않는 자가 어찌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인이 하늘을 원망하지도 않고 사람들을 탓하지도 않았던 것은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한다. 실제로는 그것이 자기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가령 그것을 알았다면 복이라 해서 기뻐할 것이 없으며, 재앙이라 해도 슬퍼할 것이 없다. 기쁨을 잊었는데 무엇 때문에 허망하게 한 생각이라도 내어 그 복에 반연하려 하겠는가? 또 슬픔도 잊었기 때문에 억지로 속임수나 계책을 늘어놓아 재앙을 피하려고 해도 차라리 죽을지언정 피하지 않는다. 더러는 구차하게 구하여 얻기도 하고, 구차하게 피하여 면한 자들도 있긴 하다. 그러나 이도 한 번 정해진 업으로서 당연한 것이지 우연히 구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구차하게 하는 짓이 쓸모없다는 것을 알았다면 복을 좇고 재앙을 피하려는 생각은 저절로 없어진다. 사념〔念〕의 자체가 공(空)해지면 간직한 마음자리도 공해져서 도에 회합한다. 불조성현의 해탈한 방법이 모두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일부러 조작하는 것이 없다면 이(理)는 저절로 빼어나게 되고, 사(事)는 자연히 수승해진다. 이(理)가 빼어나고 사(事)가 수승해지면 온 법계(法界)안의 한 띠끌이라도 나의 장엄한 세계에 있지 않는 것이 없다. 이것을 뚜렷하게 알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과 증오가 그의 알음알이를 결박하고, 좋은 것은 갖고 싫은 것은 버리려는 망상이 어지럽혀진다. 그리하여 모든 괴로움의 인연과 함께 미래로 들어가 혹독한 고초를 받는다. 그러나 정해진 분수의 업이 한결같이 자기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끝내 깨닫지 못한다면, 정말이지 민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토지가 비옥하면 심어진 곡식이 반드시 풍성해지고, 샘이 깊으면 물이 마르지 않는다. 또한 저축한 것이 많으면 살림살이가 풍족해지고, 인(因)이 원만하면 그에 따르는 과(果)도 반드시 원만해진다. 이는 천하 고금의 변함없는 진리이다.
성인은 오랜 세월동안 공덕을 쌓고 온갖 수행을 닦아 한량없는 신명(身命)을 다해 헤아리기조차 어려운 법재(法財)를 모았다. 모든 복이 빈틈없이 구족하였고, 만 가지 덕은 원만하여 세간이나 출세간에서 훤출하여 빠지거나 부족한 것이 없다. 그 베푸는 것이 마치 봄이 돌아온 것 같고, 달이 천이나 되는 강에 나타나듯이 자취없이 온다. 대체로 축적된 인(因)이 원만하기 때문에 그에 따르는 과(果)도 원만해진다.
나는 일찌기 가람(伽藍)을 건립하고 탑묘(塔廟)를 세우는 자를 자세히 관찰한 적이 있다. 혹시라도 4방에도 찾아오는 사람이 많지 않거나 그 형세가 미약할 경우는 많은 재물로써 사람을 모으고, 방편으로써 구하며, 교묘한 계책을 꾸몄다. 심지어는 세력을 동원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모두가 보리(菩提)의 뜻에 위배되는 것이다. 가람을 건립해도 깨달음과 상응하지 못할 경우는 불법에는 아무런 이익도 없고, 공덕도 없으며, 남을 이롭게 하는 선행(善行)도 없다. 이것은 허망한 업을 따라서 수순한다는 견해에 바탕이 될 뿐, 보살행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보살이 원만한 깨달음을 수행을 할 때, 가람이나 탑묘를 건립하는데 잘 구비가 안되거나 부족한 경우를 만나면, 근본인(因)이 부족한 것을 반성하고 정근(精勤)을 가다듬어 고행을 닦는다. 이렇게 해서 반드시 깨달음이 수승한 행이 만족하기를 기다린다. 시주단월들이 지녔던 재물을 헌납하면서도 그것을 받아주지 않을까 염려하게 되면 시주하는 사람 쪽으로는 보시바라밀(布施波羅密)이 이뤄지고, 스님에게는 원만한 깨달음이 이뤄진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가람과 탑묘를 건립하는 방법이 빈틈이 없고 완벽하지 못할 경우, 지혜로운 재주를 동원할지언정 세력으로 해결하는 것은 원래 되지 않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많은 재물로써 취하는 경우야 어찌 이치에 어긋나겠읍니까?"
내가 이에 대답하였다.
"도인(道人)이 가람과 탑묘를 건립할 경우는 자신이 도를 먼저 수행한 뒤에 중생들을 이롭게 하려고 합니다. 중생들을 이롭게 한다는 것은 반드시 나의 원만한 깨달음의 위치에서 균등하게 실천해야 합니다. 중생들은 탐심이 쌓여서 모든 괴로움을 다 받읍니다. 재물이 많으면 많을수록 탐심은 더욱 심해서 중생들을 더더욱 괴롭게 만듭니다. 자신의 재산을 헌납하면서도 받아주지 않을까 염려하는 사람과 그를 비교한다면,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모든 곳에 도가 있다는 뜻은 무엇인가 ? .
동산연조(東山演祖; ? ∼1104)스님께서는 "모든 곳에 도가 존재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자 어떤 사람은 이에 대해 말하기를 "모든 곳이란 바로 만사(萬事)이며, 만법(萬法)입니다. 또 세간의 사법(事法)과 출세간의 지극한 도(道)는 서로 표리 관계를 이루는 하나입니다. 그런데도 굳이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군더더기가 아니겠읍니까?"
내가 대답하였다.
"그대는 무슨 말을 그리도 쉽게 하십니까? 동산연조께서 존재한다고 말씀한 이유는 서로 섞어서 간격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모든 허망한 차별은 바로 그것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일상생활로 말한다면, <모든 곳>이란 옷을 입고 밥을 먹는 것까지 모두 포함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옷을 입을 때 몸 전체가 도라고는 생각할지언정, 실오라기가 옷이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읍니다. 또 지혜로운 사람은 밥을 먹을 때 입에 가득한 것이 도라고는 생각할지언정 곡식의 알맹이가 밥이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읍니다. 그밖의 갖가지 경우에도 어느 것도 도와 일체가 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읍니다. 도와 일체가 된다는 참 뜻이 분명하면 존재한다는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깨닫지 못한 사람은 이와는 반대입니다. 옷을 입을 때도 그것이 도인 줄을 알지 못할뿐 아니라, 옷에 대해 알음알이를 일으켜 허망한 짓을 하여 갖가지 분별을 짓읍니다. 분별에 빠지게 되면 생사에 끝없이 묶여버리고 맙니다.
`모든 곳에 도가 존재한다'할 때에 이 존재의 뜻에는 두 종류가 있읍니다. 즉 세상물정에 섞여서 존재한다는 뜻도 있으며, 그저 자기의 수행만 굳건히 존재한다는 뜻도 있읍니다. 깨달아 통달한 사람들은 혼합되어 하나라는 말은 하지만, 실제로 혼합되어 하나인 줄은 모릅니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배우는 사람들은 그저 자기의 수행만 굳건히 지킴으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자기 수행만을 굳건히 지킨다'는 뜻은 순수한 정념(正念)으로써 배워야 할 도를 생각하여 범부와 성인을 떠나고, 증오와 사랑을 끊고 부지런히 수행하여 잠시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지중한 보배를 손에 잡은 듯, 봄날에 살얼음을 밟은 듯이 더욱 굳게 조심하고, 신중히 발걸음을 떼놓는 것입니다. 홀연히 깨달아 내가 능히 도를 닦노라 하는 생각과 또 닦아야 할 도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돌이켜 관찰해 보면 그것들은 모두 일정한 본체가 없읍니다. 종일토록 분명하게 작용한다 해도, 억지로 하려 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인연이란 무엇인가 ?
옛날 가르침에 `사람에 인연이 있으면 쉽게 믿고, 법과 인연이 있으면 쉽게 깨달음에 들어간다'고 하였다. 여기서 인연이란 무엇인가 하면, 오랜 겁 동안 심었던 인(因)이 금일에 감응하는 것이다. 연의 회합은 불조성현도 피하고자 했으나 피하지 못했다. 더구나 나머지 중생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동산연조 스님께서는 `한결같이 목전의 연을 따른다〔信〕'는 훌륭한 훈계가 있었다. 이것은 바로 순종을 뜻하는 것으로서, 바르게 순종하여 흘러 넘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자신으로부터 감응하여 나타나는 것을 업(業)이라 하고, 다른 것으로부터 감응하여 나타나는 것을 연(緣)이라 한다. 깨달은 사람은 한 과보(果報)의 연이 성숙됐다는 것을 알고 멀리하려거나 얻으려 하지 않고, 기쁨·슬픔에도 관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도리를 모르는 사람은 좋으면 구차하게 얼른 가지려 하고, 싫으면 구차하게 얼른 버리려고 한다. 그러다가 얼른 가지려는 욕심이 이루어지면 금새 뽐내고 과시하다가, 구차하게 얼른 버리려는 욕심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탄식과 원망을 그치지 않는다.
보연(報緣)이 한 번 정해지면 구차히 피하려 해도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면, 종신토록 좋아하는 것을 가졌다고 해도 더 기뻐하지도 않고, 죽도록 싫어하는 것을 만난다 해도 더 노여워하지도 않는다. 경전에 `미운 사람을 만나는 고통과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에 대한 말씀이 있다. 여기서 말한 괴로움이란 목전의 연(緣)을 따르려 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받는 것이다. 가령 목전의 연(緣)이 당연히 그러리라는 것을 알고 바르게 순종했다면, 괴로움이 침투할 틈이 없다. 이것은 세상의 변치 않는 연(緣)이다. 도인은 출세간의 종지를 탐구하는 사람이므로 본래 보연으로 의론할 것은 못된다. 그러나 추리해 보면 보연에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다.
옛날에 하나를 듣고 열을 깨달아 대총지(大總持)를 갖춘 사람이 있었는데, 이것은 오랜 세월 동안 보리도(菩提道)의 연(緣)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겨자와 바늘이 서로 투합〔鍼遭相投〕하듯 오랫 동안 잊었던 것이 갑자기 기억나 알음알이를 굴리지 않고 즉시에 통달한 것이다. 또는 스승과 제자의 보연이 성숙되어 그 음성을 듣거나 용모만 바라보아도, 방편을 자세히 베풀지 않더라도 그 즉시 종지를 깨닫기도 한다. 더러는 종신토록 배워도 깨닫지 못하는 자가 있는데, 이것은 숙세의 연이 아직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이 성숙되지 않았는데도 억지로 깨닫기를 바란다면, 어린아이들에게 어른의 일을 대신하게 하는 것과 같다. 어찌 이것을 바른 이치라 하겠는가? 보연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힘써 노력하고 부지런히 정진하여 오래도록 물러나지 않는다면, 하루 아침에 힘 센 장사가 남의 도움 없이 팔을 굽히듯이 스스로 깨달을 것이다. 이것도 역시 어찌 보연이 아니겠는가! 왜 보연이 아니라 하겠는가!
근본적인 수행의 태도는 무엇인가 ?
살림살이를 하는 목적은 재물을 모으는 것이고, 몸을 수양하는 목적은 원기(元氣)를 기르는 데에 있다. 세상에는 근본을 튼튼하게 하지 않고 겉모양만 꾸미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잘못을 해도 보통 잘못이 아니다. 이웃집에 두 명의 아들이 있다고 하자. 한 사람은 건강하여 천 근을 들어도 무거운 줄 모르고 하루종일 일을 해도 피곤한 줄을 모른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초췌하고 연약하여 일년내내 병석에 누워 있었다. 우연히도 의사가 두 사람의 맥을 짚었다. 그런데 놀라웁게도 의사는 건강한 사람에게 말하기를, "시맥(屍脈)을 범하면서 일을 하였으니, 몸은 비록 건장하나 맥이 병들어 머지 않아 죽을 것입니다"하였고, 초췌하고 연약한 사람에게는, "6맥(六脈)이 화평해서 비록 몸은 병들었어도 맥이 건강하므로 곧 원래대로 회복할 것입니다"고 하였다. 그랬더니 오래지 않아 과연 의사의 말처럼 되었다. 몸의 편안함과 위태로움은 맥에 달려 있고, 맥의 상태는 원기에 의해 좌우된다. 따라서 근본을 조심해야 한다.
내가 관찰해 보건대, 교종(敎宗)·선종(禪宗)·율종(律宗)의 세 종파가 도량을 세우고 전원(田園)을 모은 것은 마치 강한 나의 신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계·정·혜(戒定慧)의 세 무루학(無庄學)이 바로 나의 맥이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 혼자 가만히 채찍질하고, 은밀하게 단련하여 굳게 지키고 힘써 실천하지 않으면 나의 맥은 머지 않아 병들 것이다. 옛날 우리 불교가 3무1종(三武一宗)의 폐불(廢佛) 사건을 만났던 것은 내 몸이 병들은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다가 이윽고 계·정·혜의 근본 맥이 뛰게 되자 살아날 가망이 생겼다. 그 뒤 오래지 않아서 병은 사라지고 몸은 더욱 건강해졌다. 이것은 근본이 견고했던 것을 증험한 사실이다. 아아! 그 근본을 견고하게 하려고 하지 않는 자는 외호(外護)의 힘을 빌려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또 거기에 문채를 더하여 수식까지 하지만, 이것은 맥과 원기가 깎이고 상하면 생명이 오래 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짓이다. 또한 이것은 재앙이 어느날 갑자기 발생하는 것을 모르는 짓이다. 이것이야말로 매우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떤 한 사나이가 100묘의 전답을 경작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협조를 구했다. 속담에서는 이것을 반공(伴工)이라 부른다. 상대방이 내 농사일을 돕는 것은 쉽지만, 내가 보답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훗날 보답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먼저 쉽게 도움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 옛 사람들은 말하기를, "급히 길러낸 인물은 반드시 요절하고, 급히 쌓은 공로는 반드시 쉽게 무너진다"고 하였다. 천하의 일이 처음이 쉽지 않으면 뒤에는 그렇게 어렵지 않듯이, 처음에 어려움이 없으면 나중에는 오히려 처음처럼 쉽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맹자(孟子)는, "하늘이 이 사람에게 중대한 책임을 내리려면 반드시 먼저 그 사람의 심지(心圍)를 괴롭히고, 그 근육과 뼈를 수고롭게 하며, 그 몸과 살을 굶주리게 한다"고 하였다. 어려움과 쉬움을 분명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어려움과 쉬움의 이치는 저절로 드러났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 이치에 어두운 사람은 쉬운 쪽을 추구할 뿐, 일에 임할 때 경중(輕重)의 분수가 없다. 그런 사람은 쉽고 간단한 것만 약삭빠르게 하려 한다. 그리고는 성공을 하게 되면 마음에는 승리감이 넘치고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하게 된다. 그러다가 어느날 갑자기 쉬운 일은 없어지고 어려운 일을 만나면,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의롭지 못한 행동에 쉽게 빠진다. 그러나 이치에 통달한 인재는 보통 사람의 행동과는 다르다.
비록 어렵더라도 순순히 받아들이고, 쉬운 일도 조심해서 처리한다. 쉬운 일을 조심해서 할 수 있다면 구차하게 얻겠다는 얼굴을 할 필요도 없으며, 어려움도 순수하게 받아들인다면 피하려 괴로운 몸짓을 할 필요도 없으리라. 나의 천진한 성품이 희로득실(喜怒得失)에 혼란이 되지 않으면, 도는 그 가운데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노자(老子)는 말하기를, "쉬움이 많으면, 반드시 어려움이 많다"고 하였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쉬운 것만 숭상하고 어려운 것은 등지는 경우가 많다. 혹 거들떠 볼만한이치가 없다면 성인의 말씀도 모두 헛소리가 될 것이다. 깊이 생각하고 생각해야 한다.
불법에 깊고 얕음이 있는가 ?
고창(高昌)땅에서 살던 한 장자(長者)는 평소에 도를 닦을 뜻이 있었다. 귀한 벼슬에 올라서도 성내거나 노한 얼굴을 전혀 보이질 않았다. 하루는 그 장자가 내게 말하였다.
"불법(佛法)에는 두 가지 길이 있는데, 곧 얕음과 깊음이 있읍니다. 그 심오한 것에 대해서는 속인(俗人)이 본래 알 수 없겠으나, 얕은 것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박식하게 듣고 익숙하게 이해했읍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음이 듣고 보았던 것과는 서로 달라서 스스로를 책망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그래서 내가 그에게 물었다.
"불법은 광대하여 온 세계에 두루 들어 있어서 부처와 조사라 해도 이것을 바로 보지 못합니다. 그대는 어떤 사람이기에 도의 깊고 얕음에 대해 말하십니까?"
그러자 그 장로가 말했다.
"심식(心識)의 참 뜻과, 경관(境觀)의 차별과, 깨달은 이치의 잘잘못과, 계를 잘 지키고 못 지키고 등이 모두 불법의 심오함입니다. 가령 세간의 재물은 독사보다 해로워 선근(善根)을 손상시키고 괴로움의 근본을 자라게 한다고 말한 것은 불법의 얕은 것입니다. 최초에 입도(入道)하면서부터 여러 스님들의 문전을 편력하였읍니다. 그런데 한 사람도 이처럼 가르치지 않는 분이 없었읍니다. 그러나 평소에 세간의 재물을 생각하면 하찮게 보아왔읍니다. 은혜를 베풀어주기를 바라는 자가 문앞에 와서 재물을 달라고 할 때, 인색하게 아끼고 지나치게 아끼고 탐내는 감정이 눈 앞에 엇갈렸읍니다. 이것은 재물을 축적하는 것이 자기에게 금지되었다고 해서 남도 재물을 갖지 못하게 하는 심보일 것입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그대에게 재물을 보시하는 것은 번뇌를 보시하는 것이므로, 재물을 주지 않는 것이 그대를 독사의 구덩이에서 구해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느모로 생각해 봐도 끝내 비루하고 인색한 마음을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나는 이로 인해 문득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가 평일에 듣고 이해했던 것은 거짓 마음이었으며, 인색하게 아꼈던 것이 그의 솔직한 감정이었던 것이다. 진솔한 감정은 겉으로 보아서는 알 수 없다. 마음의 밑바닥에 들어 있어 통철히 깨달아 그 밑바닥을 털끝만큼의 찌꺼기도 없이 뒤집어버리지 않으면, 잠깐 사이에 다시 눈 앞에 나타난다. 비록 갖가지로 오묘하게 이해했다고 해도, 이것은 신을 신고 그 위를 긁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덧없는 생사(生死)를 생각하는 것은 참된 마음이며, 들뜬 알음알이로 이리저리 꿰어 맞추는 것은 잘못된 알음알이이다. 이것은 반드시 버려야 한다.
시비를 따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
아무리 작은 털끝을 볼 수 있는 사람이라도 자기의 눈이 깜짝거리는 것은 스스로 보지 못하며, 천 근의 무게를 드는 사람도 자기 몸은 들지 못한다. 옛 사람의 이 비유는 다른 사람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쉽지만, 자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데는 어두운 폐단을 잘 말해주는 말이다. 친구들과 이 문제를 의론했는데, 손님 중에 그때의 그 문제를 장황하게 늘어놓으면서 탄식을 하며 상을 찌푸리는 자가 있었다. 그리고는 이런 질문을 하였다.
"인심은 옛과 같지 않고 세상의 도덕은 날로 문란해져 갑니다. 그런데도 삼백이나 오백씩 대중을 모아 큰 건물을 짓고 예의를 극진히 하는 곳이 많읍니다. 그러나 자기의 주장대로 일이 되지 않거나, 제가 주장하는 말에 대꾸하지 않으면 매우 분노해서 원수보다 더 심하게 굽니다. 그 많은 손님을 대하는 주지는 쩔쩔매며 뒷바라지를 하는데, 그 모습은 마치 봄날 살얼음을 밟듯, 호랑이 꼬리를 밟듯 조심합니다. 이렇게 해서야 어디 해탈을 기대할 수 있겠읍니까? 옛날 총림에서는 윗 사람과 아랫 사람이 서로에게 간섭을 하지 않았읍니다. 그러나 그런 여풍(餘風)은 지금에 와서는 다시 보지 못하겠군요"
내가 대답했다.
"그대의 말은 지나치십니다. 그대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듣지 못했읍니까? 옛 가르침에 `제가 사는 지역에 인연이 있으면 믿기 쉽고, 법에 인연이 있으면 들어가기 쉽다'고 하였읍니다. 어떻게 고금(古今)과 정법(正法)·상법(像法)의 구분이 있겠읍니까? 가령 나에게 인연과 복이 없으면 수백 년전 수행하던 대중과 함께 살더라도 옛 사람이 또한 지금 사람과 같을 것입니다. 인심은 좋고 나쁜 것이 없읍니다. 좋고 나쁨은 단지 내 인연에 있을 뿐입니다. 나에게 인연과 복이 있으면 천마외도(天魔外道)라 해도 도리어 나를 보호하는 무리가 됩니다. 그러니 어떻게 순종하지 않을 재간이 있겠읍니까? 이것을 두고 이른바 `인연을 만나면 과보를 스스로가 받는다'고 한 것입니다. 인심이 좋은 것도 과보이며, 그렇지 못한 것도 또한 과보로서 모두가 자업(自業)이 빚어낸 것입니다. 어찌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만들 수 있겠읍니까?"
이 말을 듣고는 수긍하면서 물러갔다.
공(空)·가(假)·중(中) 3제의 뜻은 무엇인가 ?
진제(眞諦)·속제(俗諦)·제일의제(第一義諦)는 셋이면서도 하나이다. 이것은 물·파도·얼음이 셋이면서 하나인 것과 같은 이치이다. 금화·소반·비녀는 모두 금으로 만든 것이다. 그것은 쓰임새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본체는 다를 바가 없다. 본체의 측면에서 사물의 작용을 관찰하기는 쉽지만, 각각의 작용을 모두 합쳐 본체로 귀납하기는 어렵다. 모름지기 알아야 할 것은 본체는 작용하는 속에 있고 작용하는 속에서 본체를 찾을 수 있다. 만일 오묘하게 깨닫지 않고 알음알이로만 이해한다면 서로 맞아떨어지질 않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한 <셋>은 무슨 뜻이겠는가? 진제(眞諦)·속제(俗諦)·중도제일의제(中道第一義諦)이다. 그렇다면 <하나>는 무엇인가? 바로 그 사람의 본래의 마음이다. "<하나>에 상즉(相卽)한 <셋>이다"고 말하는 것은 이 마음이 곧 진제이기도 하고, 속제이기도 하고, 중도제일의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진제·속제·중도제일의제가 모두 자기 마음의 현량(現量)이 밖으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형계(荊溪:711∼782)스님께서는, "진제는 모든 법을 부정하고, 속제는 모든 법을 긍정하고, 중도제일의제는 모든 법을 통일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옛 가르침에도 "진리〔諦〕라는 측면에서는 본래 진제와 속제 둘이지만, 깨닫고 보면 본래는 항상 하나이다"고 했던 것이다.
현수(賢首;643∼712)스님이 말한 4구(四句)의 게송에도, "진제를 의지하여 속제로 들어감이 1구이고, 속제를 따라 진제에 회합하는 것이 1구이며, 진제이니 속제이니 하는 구별을 버리고 중도제일의제에 들어가는 것이 1구이고, 중도제일의제에 상즉하여 진제·속제를 모두 수용하는 것이 1구이다"라고 한 것이다. 천태(天台;538∼597)스님도 말하기를, "진제는 독립적으로 진제가 아니라, 속제에 대한 상대 개념으로써 진제이다. 속제 또한 독립적으로 속제가 아니라, 진제에 대한 상대 개념으로서 속제인 것이다. 중도제일의제 역시 독립적으로 중도제일의제가 아니다. 말하자면 진·속 2제(二諦)는 하나이면서 독립단독자가 아니고, 둘이면서도 독립개별적인 둘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드러내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부정하여, 상즉상융(相卽相融)하여 중도제일의제가 되는 것이다"고 하였다. 또한 "공(空)이 절대독립적인 공〔斷空〕이라면 색(色)과 융합하지 못하고, 색이 절대독립적인 색〔實色)이라면 공과 혼합하지 못한다. 절대독립적이면 공이 아니고, 절대독립적이면 색이 아니다. 서로 두 극단에 서 있으나 완전한 중도이다. 이러한 심체(心體)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진제를 마주하면 단견(斷見)에 집착하고, 속제로 들어가면 상견(常見)에 미혹된다. 두 견해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면 중도에서 어긋난다"하였다.
이 말은 경학(脛學)을 강론하는 자들이 일찍부터 주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주장은 했으면서도 실제 이치는 깨닫지 못했다. 그 까닭은 알음알이로 문자에 의지해 이해했을 뿐 오묘하게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묘하게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주관·객관의 자취가 뚜렸해졌고, 알음알이가 많아질수록 미혹의 정은 더욱 무거워진다. 이른바 <깨달음>이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이겠는가? 그것은 이 한마음의 지극한 본체를 직접 보았다는 것이다. 그럼 <알음알이>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3제(三諦)의 헛된 자취만을 마냥 연구한 것이다. 그러나 깨달음은 알음알이와 다르고, 알음알이는 깨달음과 다르다. 깨달음은 지취와 마음으로는 통하지만, 말로 의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진실하게 참구한 사람은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학문으로 이해한 것이 설사 현묘하고 현묘하다 할지라도 확철대오한 것에는 견줄 수가 없다.
애증심으로도 도를 깨칠수 있는가 ?
정(情)은 애(肯)와 증(憎) 때문에 생기고, 자취는 진(進)과 퇴(退) 때문에 생긴다. 바로 이 애증과 진퇴 때문에 인간이 생사에 유랑하며, 3계(三界)에 윤회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세간을 초월하고 멀리 성도(聖道)에 계합하여 보리를 신속하게 증오(證悟)하는 첩경이기도 하다.
앞에서 말한 <유랑>과 <초월>은 무슨 뜻이겠는가? 성인께서 언교(言敎)를 통하여 알려주려 한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도를 깨닫도록 한 것이고, 또 하나는 업에 얽매이는 이유를 밝히려 한 것이다. 아끼는 마음〔肯〕 때문에 도를 깨달을 수 있다는 뜻은 공적인 재물을 아끼고 여러 사람을 아낀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상주물(常住物)을 마치 자기의 안목(眼目)을 보호하듯이 아끼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공적인 재물을 아낀다는 뜻이다. 그래서 옛 가르침에도, "내가 많은 생을 통하여 깨닫기를 바랬던 까닭은 일체 중생을 구호하여 괴로운 생사윤회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그런 것이다"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중생을 아끼는 것이다. 이렇게 아끼는 마음을 품게 되면 깨달음을 기약하지 않아도 자연히 깨닫게 된다.
아끼는 마음에 업에 결박된다는 것은 자신을 아끼는 것이고, 자기의 가까운 권속을 아낀다는 뜻이다. 자신을 아끼기 때문에 아첨·질투·반연·치축(馳逐)·광망(狂妄)·전도(倒)가 마구 일어난다. 자기의 권속을 아끼려고 옳고 그른 것을 따지지 않고 마구 날뛴다. 이렇게 몰지각하게 권속을 아끼다 보면 생각마다 생사의 업습(業習)과 뒤얽혀버리고 만다. 이와는 반대로 증오가 있어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은 자기를 책망하는 것이다. 자기의 가까운 권속 중에 올바른 수행을 안하는 자를 또한 책망한다. 자기를 책망하기 때문에 게을러서 그저 편함만 바라는 잘못이 있게 되면, 스스로를 경책하고 이 점을 뼈아프게 생각하며, 깊이 반성하여 고치고 후회한다. 그러니 무엇 때문에 따로 깨달으려는 노력이 필요하겠는가? 반면 자기의 잘못을 증오하는 태도를 버리는 경우, 다른 사람의 잘잘못을 들춰내게 되고 급기야는 분노가 가슴 속에 쌓이고 불만이 얼굴에 가득해진다. 이것이 바로 업에 얽매이는 것이다.
사랑과 증오의 도는 이와 같고, 진퇴의 이치 또한 이와 같다. 유가(儒家)에서 말하기를 "벼슬자리에 나아가면 충성을 극진히 하고, 벼슬에서 물러나면 자기의 허물을 보완한다"는 훈계가 있다. 그러니 우리 부처님의 가르침인들 어찌 그와 다르겠는가?
나아간다는 것에도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자기를 위해 나아가는 것이고, 또 하나는 타인을 위해 나아가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나아가는 것은 깨달음을 위해 나아가는 것이다. 꾸준히 용맹스럽게 수행을 하고 계행을 낱낱이 지켜서, 아침에는 저녁이 빨리 올까 걱정하고, 저녁에는 아침이 밝을까 걱정하듯 열심이 해야 한다. 또한 생각생각이 머리에 불을 끄듯 하여 잠시라도 잊어버리려 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자기를 위해서 나아가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 나아가는 것은 공무(公務)를 관장하고 교화의 방편을 행하는 것이다. 침식을 잊을 정도로 부지런히, 추위와 더위도 잊으며 털끝만치라도 다른 사람에게 이익이 된다면 반드시 실천을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사람은 감히 자기의 이익 때문에 공무를 태만히 하지 않는다. 이 경우를 두고 공직을 맡는 것이 도를 깨닫는데 도움이 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훌륭한 공직살이라고도 한다. 혹 그렇지 못한 사람은 명리를 구하는 마음을 허망하게 일으켜 얼굴이 꺼멓게 되고 발에 못이 박히도록 숨돌릴 겨를 없이 분주하기만 하다. 그 결과 생각할 수도 없이 업보만 계속 쌓여 공직에 나가 있을수록 더더욱 업에 얽히고 만다.
공직에서 물러나는 것도 또한 두 종류가 있다. 숨어서 운둔하는 생활을 고상하게 여겨 도념(道念)을 지키기만 하는 부류가 있고, 조용하고 한가한 것을 숭상하여 세상을 업신여기는 부류가 있다. 이 두 부류를 모두 공직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그러나 진짜 물러나는 것과는 그 차이가 하늘과 땅만큼 크다. 정말로 타인을 위해 일할 만한 능력이 부족하고 세상을 교화할만한 재능이 부족하다고 생각되어서 공직에서 물러나 은거해 열심히 도를 닦는 경우가 있다. 그런가 하면 자기의 수행을 마치지 못해 감히 세상 일에 망령되이 간섭하지 않고 깊은 산 속에 은거하여 인적이 끊어진 곳에서 자신과 세상을 잊어버린 경우가 있다. 이런 물러남이야말로 비로소 도에 합치된다고 하겠다. 그러나 개중에 어떤 사람은 교제를 끊게 되면 구애를 받지않아 먹고 사는 것에 부족함이 없어 따로 세상에서 더 구할 것이 없다고 믿기도 한다. 따뜻한 옷에 배불리 먹으면서 제멋대로 지낸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속세를 끊었다"고 말한다. 높은 누각에 누워서 쓸데없는 이야기나 늘어 놓으면서 도리어 대중들을 나무라고, 공적인 소임을 맡은 사람을 비웃기도 한다. 게으르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자기가 여태껏 입은 은혜를 갚을 줄도 모른다. 이럴 경우 어찌 공직에서 물러나 도를 닦는 자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다 어느날 문득 보연(報緣)이 다한다면, 앞으로 닥칠 업(業)을 어찌 피하겠는가? 생사의 굴에 빠져들어 자기의 배꼽을 스스로는 깨물지 못하는 것처럼 피하지 못한다.
애증과 진퇴의 이치는 흑백처럼 분명해서 깨닫는 쪽으로 가거나 아니면 번뇌의 업을 쌓는 쪽으로 가거나 아니면 번뇌의 업을 쌓는 쪽으로 가게 된다. 한 생각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받는 과보는 엄청난 차이가 난다. 「능엄경」에서도, "그대를 윤회전생하게 하는 생사의 결근(結根)은 너의 6근(六根)일 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대가 신속히 깨달아야 할 해탈과 묘상(妙常)도 너의 6근일 뿐 다른 것이 아니니라"라고 한다. 이것은 애증과 진퇴가 도에 합치될 수도, 업을 맺을 수도 있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 말이겠는가?
눈밝은 납자들이여! 업의 결박이 깊지 않고 도가 멀리 떠나지 않았을 때 부지런히 용맹수행하여 기연을 굴리고 일찌감치 깨치기를 노력하소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걸핏하면 업의 결박을 만나게 되리니, 두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東語西話 下卷
불법의 비방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
한유(韓愈:768∼824)는 당나라의 유명한 유학자이다. 그는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이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모르고, 많은 글을 발표하여 불교를 비난했다. 태전(太 )스님이 그의 잘못을 강력하게 지적했는데도, 한유는 여러 서적에서 헐뜯고 비난하는 얘기를 계속했다. 유종원(柳宗元:773∼819)도 한유와 동시대 사람인데, 문장으로써 당대를 울렸고 많은 조사들의 비갈(碑碣)을 지어 불교를 세상에 드날렸다. 불교의 극치를 이룩하지는 못했으나 애초부터 한유가 불교를 헐뜯고 훼방했던 것을 본받지는 않았다.
한편 송나라 때에 구양수(歐陽修:1007∼1072)가 출현하여 문장을 한유를 본받고 한유의 「원도론(元道論)」을 근본으로 해서 불교를 비난했다. 날이 갈수록 불교에 대한 유생(儒生)들의 비난은 더욱 심해져서 불교는 더더욱 곤욕을 치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 비판이 얼마나 얼토당토 않은지는 그네들은 몰랐다. 그러는 사이에 부질없고 흉흉한 말만 많아졌을 뿐이지, 불교 자체를 비판하지도, 그렇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