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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논문 구성사고 틀 (신경) 0
 작성자: 신경스님  2010-11-15 02:23
조회 : 4,846  
졸업논문......
제출일은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한 글자도 못썼다고 하니 아무도 믿질 않는다. 사실 머릿속으로 지금껏 구상만하고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안심이라도 해야하는지.....아무튼 불교적 입장에서 업설을 살펴보려는 것 그냥 막연한 업설이 아닌 개인적인 사견이 될 수도 있겠지만 정말 스스로 써보고 싶었다.
  남방 상좌부계통에서 아함부에 포함이 되진 않지만 중요한 카타바투(논사)로 생각하고 있는 밀린다팡하의 내용중에서 하나의 포인트를 잡고 글의 실마리로 쓰고자 했다. 그리스의 왕인 메난드로스가 제기한 양도논법에서 부처의 전생인 로마사카사파라는 선인이 찬다바티라는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겨 수백의 살아있는 생명들을 죽이게 되는 소마대공희제를 거행하였다면 불이 자신의 과거세에 그 누구도 죽인적이 없다는 것은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것이 아니냐는 왕의 질문에 나가세나는 본심에서 행한 것이 아닌 행위에 있어서는 마치 미친사람이 행한 범죄에 있어서 죄를 부과할 수 없듯이 큰죄가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것은 불교의 동기론적 해석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베다의 범신론적 제사주의적 업설이나 업을 하나의 물질로 보는 자이나교의 물심이원론적 업보관처럼 결과론적 특성, 또는 육사외도중 푸라나카사파등이 주장한 선악 모두를 인정하지 않는 도덕부정론과 과는 다른 것이다.
  사실 위의 자타카적 문헌을 분석해볼때 두가지 문제점이 발생하게 되는데 AD2-3세기경 거의 진실로 신봉되고 있었다는 자타카가 실은 현대적 학자의 연구결과로서 당시의 많은 민간담들에 대승초기 붓다의 신격화와 초인화 경향을 거친 붓다의 이미지가 투영되어 많은 구비전승담들이 생겨났다는 설화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밀린다팡하의 대론이 실제 있었던 일이냐라는 역사적 진위여부를 떠나서 5부아함의 끝에 위치한 자타카의 내용을 사실로 모두 믿어야 하는가 아니면 학자들의 연구처럼 하나의 설화로 인정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밀린다팡하에서 나가세나 존자의 답변을 옹호하기위해 자타카의 모든 사실을 사실로 인정한다면 학자들의 연구와는 이견이 발생하고 본생담이 사실이라는 대전제를 깨어버린다면 다시금 나게세나의 답변에 대한 해석이 필요하며 어쩌면 부처의 숙명통등의 육신통을 부정하게 되는 결과가 초래된다. 따라서 개인적으로는 그러한 논란이 되는 자타카의 진위여부는 차치해 두고서라도 나가세나존자의 답변에 대한 부적절성을 지적할 필요가 있었다.
  사실 역사적 문헌을 살펴보면 로마사카사파가 직접 소마공희제를 올린것이 아니라 참석을 부탁한 바라문의 꾐에 넘어가 찬다바티에게 마음을 빼았긴 것으로 되어있다. 즉 직접적인 살생행위를 한것이 아니라 살생제의에 참석한 것이었다. 따라서 직접적인 살생행위는 아니었지만 간접적인 살생행위의 동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사회법적으로도 공범의 범행을 처벌한다고 볼 때 그의 행위또한 살생을 용인하였다는 측면에서 불살생계를 어긴 것이다.
  결국 나가세나는 어쩌면 그러한 역사적 내용에 대한 식견이 부족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문제는 본심에서 행하지 않은 죄는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본심에서 벗어났다는 것이 과연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하는 것이 문제다. 실제로 중생들이 죄업을 짓게되는 양태는 근본무명을 바탕으로하여 삼독심으로 죄를 짓게 되는 것이므로 전도망상된 소견에 빠져 즉 본심이 아닌 상태에서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가세나 존자가 얘기한 것은 잠시 마음이 동요된 신경증적 증상이 아니라 정신증적 증상이란 말인가? 아니다. 로마사카사파는 다시금 본심을 회복하여 범천에 태어났다고 기술된 밀린다팡하의 내용을 본다면 그렇지가 않다. 결국 중생이 업을 짓게되는 양태나 로마사카사파가 본심에서 벗어나 살생업에 동참한 것은 같은 메커니즘을 지니고 있다. 결국 나가세나 존자의 답변은 재고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바로 알고 짓는 죄업과 모르고 짓는 죄업의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의도성을 중시한 동기론적 업설이 나가세나가 주장한 내용이라 한다면 모르고 지은 죄에 대해서는 그 죄보를 물을 수가 없다. 남방계통의 경전상에서도 의도성이 없는 행위에 있어서는 그 죄보를 물을 수가 없다고 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도 고의성이 없는 행위에 있어서는 그 죄보를 묻지 않으신 내용이 니까야의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교의 업설을 동기론적이라고 단정해버린다면 문제가 있다.
  알고 짓는 죄업과 모르고 짓는 죄업에 관해서 나가세나는 특히 모르고 짓는 죄가 더욱 크다고 주장하는데 뜨거운 철판을 모르고 잡을 경우 더욱 많이 덴다는 것으로 그 비유를 삼고 있다. 여기서 모른다는 것은 어떤 행위의 자각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이 명제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모른다'의 목적어가 선악에 대한 판단이 되어야만 한다. 악한 행위를 하면서 그것이 악인줄 모르고 계속적으로 행한다면 악업이 쌓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악인줄 모르고 행한 행위라고 하더라도 행위를 한다는 그 느낌(자각)은 존재한다. 단지 선행인지 악행인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남방경전에는 부처님이 라훌라를 발씻은 물을 담은 항아리를 통해 교화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법이라는 거울에 비추어보아 자신과 타인에게 이익되는 행위를 하라고 설하신다. '암부로와까 수따'는 다시 선행과 악행에 대한 7가지 범주를 구분하고 있는데 자신이나 타인등에 이익이 되는 행위를 선행이라 하였고 양자에 모두 효과가 없는 행위를 선행도 악행도 아닌 행으로, 그 어느곳이라도 해로움이 발생한다면 악행으로 규정하고 있다. 결국 주체와 객체에 있어서 그 어느쪽도 포기하지 않고자 하는 불교의 의지가 담겨있다. 여기서 선행이나 악행의 판단은 제3자의 판단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자신에게 해롭지만 다른 이들에게 이익이 되는 행위를 악행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이것에 대해 살신성인이 악행인가라는 의아한 물음이 발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불교적 선악의 판단이 주체와 객체의 평등한 존엄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또한 실재와 내면의 두 가치를 모두 중시한다는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다.
  불교의 업설은 따라서 단지 동기적인 측면만을 가지고 판단해서는 안된다. 니까야를 살펴보면 과보에 대한 교설이 있는데 '의도성이 있는 악행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과보가 있으나 의도성이 없는 행위에 있어서는 반드시 과보를 받는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에서 마지막 부분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어떤 논문에서도 이것을 부분부정문이라 해석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도 그 논문을 보기 이전부터 상당히 특이한 문구이며 이 문구에 대한 해석이 새로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실제로 반드시 업을 받는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은 업을 받기도 하고 받지 않기도 한다는 것이다. 결국 비의도적 행위에 있어서도 과보를 받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아함의 분별대업경을 살펴보면 선인선과 악인악과라는 인과설을 기계론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것을 경고하는 부처님의 지적이 등장한다. 매우 복합적이고 다양한 요인이 작용하고 있기에 단편적인 생각으로, 편협된 생각으로 인과설을 부정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개인적으로는 카오스적 이론에 대입해 보고 싶었다. 또한 업설을 어떤 물질로 보는 자이나교처럼은 아니더라도 '물질은 순환하고 에너지는 흐른다'는 생물학적 개념을 적용하여 업을 엔트로피적 개념으로 해석해보고 싶었다. 또한 분자의 화학변화에서 분자들이 반응하기 위해서는 활성화 에너지 이상의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어떠한 연기법칙에서의 연으로, 또한 유효충돌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시공의 인연이 맞아야만 한다는 것도 어떠한 인으로 파악해서 연기법칙을 설명해보고 싶었다. 결국 매우 복잡다단한 환경과 원인 수단, 목적을 모두 고려해볼 때 불교의 업설은 설명 가능했다. 비의도적 행위에 있어서 업의 인이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업의 인이 확고히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상견이나 단견에 빠져버릴 수가 있다. 단견에 빠진다면 선악의 과보나 공덕지음을 모두 부정하는 푸라나카사파등의 도덕부정론에 빠지게 되고 너무 확고히 기계적으로 해석해버린다면 자이나교적 업물질주의 혹은 극단적 고행주의에 빠져버릴 수 있다. 결국 사리불이 물속의 호충을 신통으로 바라보고 물을 마시지 못하자 그 물을 육안으로 보라는 부처님의 말씀은 지혜에 바탕을 둔 중도의 가르침이었다. 물속의 호충을 먹음으로서 죄업이 생긴다거나 의도성이 없으니 죄업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은 현실적 고통으로부터의 해결을 설한 불의 가르침과는 크게 상관없는 부차적인 형이상학이 될 수 있다. 물론 진속이제적 교설에 의거하면 그것이 죄악이냐 죄악이 아니냐의 해답이 필요하겠지만, 그 물을 마시고 생명을 연장하여 깨달음이 이르러 이계과를 성취하고 업과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느냐 아니면 그 물을 마시지 않고 어차피 먹고 살아야 한다는 인간적 숙명의 한계성을 부정하고 죽음에 이르러 다시금 업과 윤회에 세계에 빠지느냐는 기로에서 부처님은 지혜라는 절대적 객관성의 입장에서 사리불에게 물을 마실것을 권유하셨다. 이것은 싱사파나무의 비유에서도 살펴볼 수 있는 부처님의 교설의 특징이다. 결국 제 3자적 입장에서 보아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옳다고 할 수 있는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 이것이 지혜이다.
  진리에의 방편을 허구로 치부하여 실천하지 않는 자는 결국 진리의 길로 나아갈 수 없다. 하지만 방편을 진리로 믿고 나아간다면 언젠가 진정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 불교에서 신해행증이라는 표현을 쓰듯이 믿음은 진리로 나아가는 가장 첫 관문이자 전제조건이다. 따라서 업설의 경우에도 의도성 하나만을 가지고 그 업인의 조건을 규정짓거나 결과만을 가지고 업을 판단하는 것은 실수다. 세상은 단편적인 사상이나 견해만으로 판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불교의 업설도 동기론과 결과론의 복합적 양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또한 선악의 판단에 있어서도 절대론적 윤리설의 입장에서 속제적 삶에서는 시공을 초월하여 항상 선이나 악으로 간주되는 것이 있으며, 그 주변을 형성하고 있는 가변적이고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상대론적 윤리설의 혼합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아야 한다.
  불교의 업설은 상단과 생사, 장단 등 온갖 극단적이고 치우친 편견에서 벗어나 있다. 단지 그것을 인도사상계내에서 차용한 것이라 하여 허구로 치부해 버린다면 부처님이 가르치신 연기법을 부정하는 것이 되며 푸라나 카사파등 육사외도의 철학이나 다를바가 없다. 하지만 업설에 너무 메여 형식주의나 편견에 빠져버린다고 해도 그것은 부처의 교설이 아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개인적으로 지혜를 절대적 객관성이라 부르고 싶다. 절대적 객관성의 견지에서 어떤 것을 바라본다면 그것의 인과관계가 확연히 바라다 보일 것이며 탐진치를 비롯하여 개인적 주관성을 떠난 가장 지혜롭고 합리적인 판단이 가능한 것이다.
  결국 업설도 이러한 견지에서 판단해야만 진정한 불교의 교설로서의 업설이 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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