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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실의 70년대를 거쳐(1972-1978)
1972년 7월 12일 석림회는 오대산 월정사에서 하계 정진법회를 개최했다. 이 법회에는 회원 29명을 비롯, 교무부 설조스님 그리고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교수등 각 대학교 수 40여 명이 같이 참가하는 큰 성황을 이루었다. 정진법회 일정이 끝난 후 참가자들은 인근 농촌부락에서 봉사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1973년 석림회(회장 신법타, 총무 한보광)는 대한불교조계종 전국신도회와 특별포교 후원 결연을 맺는 등 대 사회 활동에 관심을 돌렸다. 이 해 4월 19일 석림회 회원들은 최초로 공식적인 4.19묘소 단체 참배를 갖기도 했다. 1973년 7월에는 제 1차 전국순회 포교법회를 가져 수원, 송탄, 평택, 여주, 의정부 등지를 순방했고 백상원 불상의 개금불사를 백상원 자치회장 성도, 조계사 주지 고산스님의 도움으로 일으키기도 했다. 이 지방 순회 포교에 대해서 법조스님(6기)은 "기존 포교당에 있는 스님들의 법회보다 현실 생활에 밀착된 법문으로서의 측면이 강조되면서 신선한 느낌이 있었기 때문에 청중도 많았고 호응이 좋았다"고 회상했다.
1975년 석림회 주관으로 동국학원 정상화 및 교권수호기도 법회를 갖는 등 학내외 제반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섰고 학교 교지인 '동국'지에 승보의 존엄을 훼손하는 기사가 게재되어 당시 총학생회를 대신하고 있던 학도호국단측과 마찰을 겪기도 했으나, 석림인의 뜻을 관철시켜 ' 동국' 지를 수거, 문제의 기사를 삭제케 했다. 한편 이시기 석림회 차원 뿐 아니라 불교계 전체로 보아 뜻 깊었던 일은 ‘4·8부처님오신날’을 법정 공휴일로 제정케 했던 일을 꼽을 수 있다. 이 쾌거에 적극 나섰던 석림회스님들의 역할은 종단적으로도 매우 의미있는 활동이었다. 첫 공휴일 초파일이었던 1975년에는 동국대에서 동대문을 거쳐 조계사에 이르는 구간에서 제등행렬이 펼쳐졌다.
1976년에는 석림회 주최로 한일 불교문화교류간담회가 동국대 학생회관에서 열려 석림의 위상이 멀리 일본에까지 전해지기도 했다. 당시 일본 측에서는 조동종 청년 승려들이 이 간담회에 참석했다. 1977년 5월 5일은 졸업한 석림회 동문들이 주도하여 석림동문회가 결성되어 명실상부한 종단내 조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 날 동문회 결성식에는 선배 동문 50명, 재학생 회원 70명이 참석했다.
또 이 해에 서정주 교수가 작시하고 김동진 교수가 작곡 '석림회 歌'가 제정되어 석림인의 기상과 웅지를 노래에 담았다. 이 시기 석림회장을 맡았던 현진스님은 "이 때가 동악에서 석림회의 위상 이 어느 때보다 높았던 때로 석림을 위해 일하고 동국을 위해 죽기를 각오하면서 철저한 주인의식으로 학교내의 문제점 지적에 적극 나서 많은 것을 개정했다." 고 자부하고 있다.
1978년 석림회 회원들은 학생들의 신심을 증장시키고 불교 종립학원의 뜻을 살리기 위해 교내 범종' 동국의 종'을 매주 월요일 타종 하는 일에 적극 나서 이를 마침내 성사시켰다. 같은 해 4월 16일에는 강화 전등사에서 열린 범국민 통일기원대법회에 증명법사단으로 참여, 석림인들이 민족의 숙원인 통일에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과시했다.
1978년 그 동안 학교 내에서 별도로 승가학과에 적을 둔 승려들이 참여하던 승가학회를 흡수 통합함으로써 각 과별 학회 중심의 활동 때문에 때때로 구심점을 잃기도 했던 일을 방지하여 석림회의 위상을 더욱 높인 해이기도 했다. 또 이 해의 행사로는 석림취미전, 석림순회포교단 발단식 등이 눈에 뜨인다.
13기 진관스님은 "당시 총무원이 조계사 측과 개운사 측 두 개로 나뉘어 있던 시기에 석림인들은 종단내의 철저한 개혁자가 되어야 한다는 각오로 엄격한 규율, 강도 높은 정진을 실시했다"고 회고한다. 진관 스님에 따르면 "당시 백상원 대중공사 때도 원각경 법화경을 독송하고 공사를 시작했고 108배 실시로 사회적 종단적 혼란 분위기와는 달리 철저하게 기강을 잡았다."는 것이다. 석림회 8대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던 6기의 법조스님은 "강원 교육만을 받아서는 현실에 적응하기 힘들다는 생각에서 강원 졸업후 학교에 올라왔다"면서 "승가의 교육체계에 있어서는 답습보다는 활동의 폭을 넓히는 개선 보완이 절실하며 불교 이외 다른 강의도 들어 시야의 폭을 넓히게 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선 학교 교육이 필요했던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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