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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세월에 정법을 지키는 고통(1979-1985)
1979년에서 1979년에서 1985년에 이르는 시기는 그야말로 多事多難의 격동이 점철된 시기였다. 석림회원과 동문들은 79년 3월초 내외적으로 흩어져 살고 있는 종비생들의 바람직한 지표를 마련하고자 정각원에서 교수들과 간담회를 갖는 것으로 79년 새 학기를 열었다. 이 날 간담회의 결의에 따라 5월 8일에는 교내 다향관에서 석림취미전을 갖고 이 수익금을 각기 각처에서 포교와 정진에 힘쓰고 있는 동문들에게 전달하여 힘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으나, 이 시기 너무도 피폐해진 종단의 사정 때문에 종단으로부터 백상원 지원비가 중단되어 백상원에 살던 스님들은 굶기도 했었다고 한다. 17기의 동성스님은 "그 같은 어려움은 있었으나 불교인을 사칭한 강원도 원주시 명진홍 목사 사건 때 운주 대불련 학생이 할복했던 것에 커다란 자책과 충격을 받았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당시 초보 단계에 있었던 중앙승가대와 석림회, 그리고 전국 강원을 연계 '전국학인 연보'를 발행했던 일이 기억에 남는다"고 회고한다.
1980년 봄 동악은 이른바 서울의 봄과 맞물려 여느 때보다 역동적이며 활성화된 분위기를 보이고 있었다. 석림회도 이에 따라 많은 학내외적 관심을 표명했다. 또 이 해 봄 석림의 대 선배이기도 한 지관스님이 불교대 학장으로 부임함에 따라 석림회의 위상도 함께 부상한 해였다. 석림회는 이 해 봄에 열린 전국청년승가회 주최 전국 공청회에 참석했다. 또한 총학생회 추진위원회가 주관한 수차례의 동국정신수호궐기대회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전국학인승가연맹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1980년 가을 불교계에 불어 닥친 엄청난 찬바람으로 석림회 역시 고초를 겪는다. 10.27 법난이 바로 그것이다. 석림회 회장스님을 비롯한 다수 회원스님들이 새벽에 백상원에서 군화발의 군인들에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는 등 엄청난 시련을 겪어야 했다. 당시 백상원에 있었던 16기 법인스님은 "군인들이 군화를 신은 채 새벽에 백상원 방에 까지 들어와 소총을 들이대고 스님들을 죄인 취급 하듯 끌어내갔다. 난 그 때 말로만 듣던 빨갱이 남조선 해방군이 남침해서 내려온 줄 알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또 이 해부터는 승가학과가 선학과로 개칭되면서 승속이 함께 같은 과에 소속되어 공부하게 되는 변화를 겪어야 했다. 법난 등 엄청난 한파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석림회는 이듬해인 1981년 4월 극히 비정치적인 행사인 백상원, 기원학사간 춘계체육대회를 갖고 승속의 단합을 꾀하는 것으로 악몽을 딛고 활력을 되찾으려 했으며, 1982년을 맞아 '동국인에 비친 석림' 설문조사를 하는 등 새로운 진로 모색을 꾀하기도 했으나 1980년 10.27 법난의 여파는 쉽게 사그러들 수 없는 것이었다.
1983년 석림회는 창립 21주년 기념 석림제를 개최하고 신수대장 경영인 불사를 행했다. 동국대 재학생 비구니회가 조직되기도 했다. 또 1983학년 졸업식에서는 이전 해인 1982년도에 이어 석림회원인 비구니 스님이 교내 전체 수석 졸업을 차지해 석림인의 긍지를 한껏 높이기도 했다. 1982년에는 해주스님이 평점 4.5 만 점에 4.43을 취득 전체 수석을 차지했었고, 1983년에는 묘주스님이 1백점 만점에 93.4점을 취득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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